“나 자신이 바로 국제 이슈다. 내 생명, 내가 처한 상황이 세계적 문제의 일부다.”
중국 출신 작가 아이 웨이웨이(Ai Wei wei·64)의 말이다. 1990년대부터 표현의 자유와 난민의 삶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고국의 정부와는 늘 마찰을 빚어왔다. 체포와 가택연금, 구속이 일상이었다. 그가 누군가. 2009년 쓰촨성 대지진 관련 발언으로 환경운동가 탄줘런이 청두에서 재판받을 때, 청두까지 달려가 새벽 5시에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셀카’ 작품(‘조명’)을 찍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작업실에 박혀 창작만 하는 작가와 거리가 멀다. 블로그, 트위터, 유튜브 등 SNS로도 모자라 세계 언론과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말하자면 ‘표현할 자유’에 모든 걸 다 건 작가, 그가 아이 웨이웨이다.
아이웨이웨이의 어린 시절
사실 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중국의 유명 시인 아이칭(艾青, Ai Qing)의 아들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시인겸 동양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아이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출범한 마오쩌둥 정권으로부터 '우파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동시에, 전재산을 모조리 압수당하며 신쟝(新疆, Xinjiang) 성으로 가족과 함께 유배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매일 밤낮으로 건설 현장에서 돌을 나르며, 단지 반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홍위병(红卫兵)들에게 온갖 조롱과 수모를 당한다. 이러한 그의 안타까운 일생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나서야 고된 유배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문학계에 복귀해 창작활동을 이어가지만, 그동안 건강이 이미 많이 악화되어 결국 1996년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아이웨이웨이는, 가족들과 함께 멀고 먼 타지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아버지가 겪어온 모든 수모를 곁에서 지켜봐 왔다. 그 영향으로 인해 그 역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이후 중국 정부의 현안을 비판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선보이게 된다.
아이웨이웨이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
그런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는데, 바로 2009년, 쓰촨(四川, Sichuan) 성의 대지진으로 인해 4851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는 대참사가 일어나면서 전 세계인들이 비통한 가운데, 이 사태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아이웨이웨이는 한 학교의 부실공사로 인해 훨씬 더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과 수소문해 공사현장에서 빼돌려진 철근을 찾은 그는, 90톤가량의 철근으로 제작된 설치작품과 같은 주제로 작업한 미디어 작품 <Straight>와 함께, 희생된 무고한 생명들을 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시를 통해 선보인다.
더 나아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해당 사태의 원흉을 파헤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다큐를 제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정부의 숨겨진 검은 내막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된다.
물론 해당 전시를 통해,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지만, 동시에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본격적인 감시를 받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81일간의 수감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스튜디오가 하루아침에 철거당하고, 수감된 이후 그는 제자들과의 협업을 공식적으로 금지당하게 된다.
중국 정부의 압박
이러한 압박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의 북경 스튜디오 앞에는 같은 형태를 한 12대의 cctv가 설치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았던 아이웨이웨이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서 선보인 첫 개인전에서, 공포 그 자체였던 수감생활을 재현해낸다.
정말이지 어느 날 아무도,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수감되어, 매일같이 긴긴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아온 그는, 석방 직후 열린 해당 전시에서 대리석으로 제작된 감시카메라 조각들을 선보이며, 그에 대한 중국의 통제와 압박의 민낯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테이트모던 해바라기씨 전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50세를 훌쩍 넘긴 아이웨이웨이는, 테이트 모던에서 선보일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옛 황실의 자기를 제작하던 Jingdezhen(景德镇)이라는 지역을 찾아 1500명이 넘는 단순 노동 인부들에게 모형 해바라기씨 작업을 의뢰한다.
영문도 모르는 해맑은 인부들은 그저 파산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찬 마음으로 2년간 무려 1억 개의 해바라기 모형 씨앗을 성공적으로 제작해낸다. 사실 이 '해바라기씨'는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간식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문화 대혁명 시절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신격화/위인화하기 위해 그가 그려진 그림에 항상 그를 '태양'으로 표현했으며, 중국 인민들은 그를 우러러보는 해바라기와 그 씨앗으로 종종 표현된 바 있다.
아이웨이웨이는 그러한 점을 역이용해 자신만의 은유적인 방식을 통해 옛 중국 정부로부터 이어져오는 정치적인 탄압을 이 전시를 통해 널리 알리려 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이웨이웨이:인간미래> 전시회
세계적 미술가이자 영화감독, 건축가, 행동가인 그의 개인전 ‘아이 웨이웨이:인간미래’가 1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했다. 예술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국내에선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 전시되는 126점은 그의 면모를 국내에 처음으로 폭넓게 보여준다. 그가 중국 당국에 불편한 작가가 된 이유,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만든 그 무엇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들여다봤다.
1). 경계없는 작업
전시에서 만나는 그의 정체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이단아다. 회화와 사진, 영상, 건축, 설치, 도자, 출판 등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세계적인 건축가 헤르조그 & 드 뫼롱과 함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2008년 쓰촨 대지진 때는 온라인으로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고 시민조사단을 구성해 총사상자 수와 희생자 이름을 기록했다. 지난해 로마에선 새롭게 각색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내년 공연 예정)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는 우한 코로나 상황을 소재로 제작한 ‘코로네이션(Coronation)’ 등 다큐 3편을 선보인다. 다큐를 만드는 이유를 그는 “다른 건 없다. 역사에 증언을 남기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국가의 경계도 그에겐 큰 의미가 없다. 이번 전시에 앞서 한국 기자들과 서면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 포르투갈에 살고 있고, 얼마 전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작업 때문에 영국과 독일에도 자주 간다. 나는 떠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2). 표현의 자유
1995년부터 2017년까지 지속한 프로젝트 사진 시리즈 ‘원근법 연구’를 빼놓고 그를 논할 수 없다. 톈안먼(天安門) 광장 앞에서 가운뎃손가락을 내미는 행위를 사진으로 발표한 이후 백악관 등 전 세계 역사적 기념물 앞에서 계속해온 작업이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중국 국가보안법 아래 홍콩 정부 산하의 문화기구는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서 “중국은 1949년 신정부 수립 이래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만을 허용해왔다”고 비판했다.
3). 문화혁명
그는 1957년 베이징 출신이다. 아버지 아이칭은 유명 시인이었다. 문화혁명 때 아버지가 하방(下放, 도시 청년과 지식인을 농촌으로 보낸 정치 운동)돼 서부 신장 지역에서 자랐다. 지난해 12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아버지에겐 읽기와 쓰기가 금지됐다. 책을 소유하는 일이 반혁명, 반공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시집과 소설책을 모두 불태워야 했다”며 “(그 일은) 내게 종이에 인쇄된 단어와 그 사이에 있는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4). 도발하는 전통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을 접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확립해 나갔다. 그에겐 전통과 현대의 경계도 무색하다. 베니스 무라노 유리공예와 중국 도자기 생산지 징더전(景德鎭)의 청화백자 기법을 과감하게 현대미술에 결합하는가 하면, 레고 블록으로 대형 십이지신 두상 회화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3.1m 높이의 ‘난민 모티프의 도자기 기둥’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떠도는 현대 난민들의 모습이 섬세하게 담겼다. 전통 매체를 활용하되 현대 사회 이슈를 도발적으로 제기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유리공예 기법으로 제작된 ‘검은 샹들리에’도 눈여겨볼 작품. 그는 “이 작품은 사람의 두개골과 인체의 골격을 가지고 만들었다”며 “죽음에 직면한 어둠 속 인류를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5) 난민과 인권
난민과 인권에 대한 관심도 집요하다. ‘빨래방’은 한 전시장을 2016년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의 난민 캠프에서 수집한 난민들의 옷과 신발로 채운 작품. 당시 그리스 정부가 난민들을 이동시키자 그는 캠프에 남겨진 물품을 베를린으로 옮겨와 세탁한 뒤 목록을 만들었다. 또 난민들이 레스보스 섬에 남긴 구명조끼 140벌을 연결해 설치작품 ‘구명조끼 뱀’을 만들었다.
이런 여정은 아이 웨이웨이의 예술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예술은 문제와 모순으로부터 나오고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라며 “정치 환경이 엄혹한 상황에서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면 예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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