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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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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신화 재조명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링컨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사실 노예해방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지킨 공적 때문이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쯤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하나의 나라로 공존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강력한 연방정부의 지원과 보호, 그리고 풍부하고 자유로운 노동력이 필요했다. 남부는 여전히 대농장이 주도하는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라서, 연방정부의 간섭 보다는 각 현지 실정에 맞는 자치권력과 노예제로 대표되는 구속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노예제가 이 남북 갈등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남부 주들은 대선에서 패배하자, 즉각 연방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북부에서도 남부와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연방에서 이탈한 남부주들은 설마 링컨이 군대까지 동원해 저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데 단호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발발하자, 링컨은 연방 존속을 위한 전쟁에 승리하려면 노예해방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를 단행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나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고,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어떠한 노예도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노예를 해방해서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 내가 노예제, 유색인종에 대해 하는 것은 그것이 연방을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한 편지에서 밝힌 링컨의 이 말은 노예제와 연방 존속에 관한 그의 유명한 견해다.

남북전쟁에서는 군인들만 약 75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미국 인구가 약 3천만명이었다. 100명 중 2.5명이 사망한 셈이다. 군인들이 청장년임을 감안하면 미국의 청장년 중 10% 정도가 죽은 참사였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 깊은 내상을 남겼고,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링컨의 성장기

링컨은 1809년 2월12일 켄터키 주 호젠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잉글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토머스는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새러, 에이브러햄, 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다. 1816년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로 갔다. 링컨 가족은 통나무집에서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억척스런 아버지의 노력으로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다. 링컨의 나이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아버지는 새러 부시 존스턴 링컨과 재혼했다. 그녀는 자식이 셋이나 있는 과부였지만 어질고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링컨의 형제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으며 특히 링컨을 예뻐했다. 링컨은 훗날 그녀를 ‘천사 엄마’라 불렀다. 링컨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는 링컨에게 책 읽는 습관을 가르쳐 주었고 링컨은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먼 길을 오갈 정도로 독서에 흥미를 느꼈다. 훗날 링컨은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나의 배움을 자극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열악했던 당시를 술회했다.

 

1830년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이사했다. 링컨은 농사꾼이 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선원으로 취직해 미시시피를 강을 오르내렸다.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링컨은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될 결심을 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1836년 27세의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다. 링컨은 법률 사무소를 내고 일했지만 초기에는 일감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윌리엄 헌던을 만났다. 그는 링컨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공부도 많이 하고 집안과 인맥이 좋은 변호사였다. 링컨은 그와의 동업을 통해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키웠다. 몇 년 애쓴 보람이 있어 링컨의 변호사로서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한때 그는 연 1500달러를 벌기도 했다. 이는 당시 주지사의 연봉보다 많은 수입이었다.



링컨은 초창기 작은 형사 사건부터 시작해 금융, 철도, 보험 등의 영역으로 확대했고 그 뒤 정치적 사건을 맡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링컨은 일리노이 주에서 능력 있는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사건을 맡으면 항상 소송을 본질을 파악하는데 주력했고 법정에서는 공정하고 정직한 변호를 해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이 무렵 링컨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바로 메리 토드. 켄터키 주 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링컨의 개인적인 능력은 높이 샀지만 워낙 미미한 집안 출신인 그와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1842년 링컨은 나이 40세에 결혼식을 올린다. 메리 토드는 결혼 초기, 훗날 링컨이 정치가로서 많은 영감과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지만 장남인 로버트 외에는 모두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메리 토드는 평생을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또한 링컨이 정치에 입문하고 대통령이 되면서 메리 토드는 아이들 교육이나 집안의 모든 문제를 혼자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남북전쟁 시 그녀의 친정인 켄터키 주가 남부 연합에 속해 있어 이로 인한 갈등도 있었다. 1865년 링컨이 암살당하자 메리 토드는 큰 충격에 빠졌고 10년 후인 1875년 정신질환 판정을 받는 등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다.

 

링컨은 변호사로서 정치사건을 담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와 정당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정치가인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를 존경했다. 이 두 사람은 연방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과 사회개혁을 주장했고 링컨은 이에 공감해 이들이 속해 있던 휘그당에 입당했다. 휘그당은 후에 공화당이 된다. 링컨은 1834년부터 휘그당 당원으로 주의원에 4번 당선되어 활동했다. 당시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는 노예제도였다. 이 당시만 해도 링컨은 노예제를 반대했지만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노예제도는 부정과 악행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법으로 정한다면 노예제가 갖고 있는 악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링컨의 리더쉽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단 한 순간도 편하게 국정을 운영한 적이 없다.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도 라이벌이 존재했고 국가는 북부, 남부로 나뉘어 전쟁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독재적 권력을 사용하거나 카리스마를 이용해 정국을 돌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정적과 라이벌, 반대파들을 수없이 만나 설득하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는데 주력했다.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또한 링컨은 필요하다고, 인재라고 여겨지면 파벌과 정당 구분 없이 등용해 자신의 내각에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 애드윈 스텐턴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링컨이 변호사 시절부터 링컨의 미숙함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점을 비난했다.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이번 선거에서 링컨이 승리해 대통령이 된다면 이는 국가적 재난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링컨은 스텐턴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링컨은 변호사 시절에도 스텐턴의 비난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정도로 열린 인물이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자 애드윈 스텐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링컨의 참모들은 반대했다. 링컨은 참모들에게 “스텐턴은 나를 무시한 사람이 맞다. 하지만 나를 수백 번이고 무시하면 어떠냐. 스텐턴은 사명감이 투철한 인물이고 국방장관에 적임이다”라고 말했다. 국무장관에 임명한 윌리엄 슈어드도 마찬가지였다. 링컨의 라이벌인 그는 좋은 집안에 공부도 많이 한 인물이었다. 링컨은 그의 정치적 혜안과 강력한 친화력을 높이 평가했다. 법무장관에 임명한 에드워드 베이츠에 대해서 링컨은 “그가 나를 무능하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베이츠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그를 영입했다. 재무장관 새먼 체이스도 링컨을 비난하고 무시했지만 그 역시 링컨의 내각에 영입되었다.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스텐턴은 처음에는 링컨을 진심으로 대해지 않았고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텐턴은 링컨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가장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이 같은 링컨의 포용력은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링컨은 현명했다. 그는 공화당 내의 보수파와 급진파 중에서 심정적으로 보수파를 지지했지만 각 파벌의 수장 격인 슈어드와 체이스를 나란히 장관으로 임명해 그들에게 국정의 책임감을 안겨주면서 충실한 조언을 받았다. 링컨의 이 같은 인사권은 단순히 협치를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한 정치인과 토론을 벌인 링컨은 그의 발언에 몹시 분노했다. 참모들에게 “그는 나의 적이다. 내가 필히 제거하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후 링컨이 그와 악수를 하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한 참모가 링컨에게 “대통령님, 그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링컨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적을 제거했고 나와 악수한 사람은 이제 내 친구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같은 링컨의 포용력에 정적들도 감동했다. 슈어드는 최측근이 되었고, 체이스 역시 링컨과 일하며 정치적 야심을 버렸다. 스텐턴도 링컨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했고 베이츠는 “링컨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정도로 링컨에게 충성했다.

 

전쟁 시에도 링컨의 리더십은 빛났다. 당시 북부군 사령관 맥클렐런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다. 링컨은 그를 위로하고자 전선사령부를 찾았다. 몇 시간을 막사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들어온 맥클렌런은 대통령인 링컨을 무시하고 침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부관이 와 링컨에게 “사령관님이 너무 피곤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못 만나실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링컨을 수행한 국방장관과 백악관 참모들은 격노해 그를 해임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은 “맥클렐런 사령관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군화를 닦고 그의 말고삐도 잡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흉내낼 수 있는 리더십이 아닌 링컨만의 따뜻한 포용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최고의 라이벌은 최고의 실력자이다’라는 것을 링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사속 인물]에이브러험 링컨의 성장, 리더쉽, 재조명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키워라

 

링컨의 일생에서 실패와 좌절은 성공보다 훨씬 많았다. 가난한 개척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부터 실패라 할 수는 없지만 링컨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링컨은 4세 때 동생을 잃었다. 또한 9세 때는 어머니를 여의였다. 그뿐이 아니다. 링컨은 아들 세 명을 병으로 잃었고 그로 인해 아내는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받았다.

 

정치인 링컨에게 실패는 옵션처럼 따라왔다. 그는 23세 때 주 의원 선거에서 패배했고 29세 때는 주 의원 대변인 경선에서 낙선했다. 31세 때는 대선 선거위원에 패배했고 34세 때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40세 때는 연방 하원의원 재선에 실패했고 45세 때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47세 때는 부통령 지명전에서 패배했고 49세 때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또 패배했다. 물론 51세에 대선에서 승리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링컨에게 죽음, 패배, 낙선, 실패는 질긴 운명처럼 따라 붙었다.

 

링컨은 좌절하고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패배를 긍정의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링컨의 ‘희망 리더십’은 어떠한 실패 앞에서도 ‘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으로 연결된 것이다. 전쟁 중에 링컨은 어린 아들 윌리엄을 잃었다. 아내 메리 토드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장남마저 참전하자 아내의 병세는 더욱 짙어졌다. 링컨은 아내에게 “윌리엄을 잃고 이제 장남 로버트도 입대했다. 내 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니 당신은 대통령으로서, 아버지로서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링컨 역시 상실감에 시달렸지만 그는 ‘참아내기 어려운 아픔과 실패’도 극복하는 불굴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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