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패트리샤 켈리
Grace Patricia Kelly
1929년 11월 12일 - 1982년 9월 14일 (향년 52세)
195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왕성히 활동하여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영광을 누리다가 모나코의 공비(公妃)가 된 미국의 배우. 특유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와 세련된 패션 스타일로 유명했으며, 할리우드 전성기인 1950년대에 활동하던 세기의 스타(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중 한 명이다. 제임스 스튜어트, 캐리 그랜트와 함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페르소나로도 알려져 있다.1929년 11월 12일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9월 14일 모나코에서 교통사고로 비교적 젊은 나이인 만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세기 패션의 아이콘
50년대 패션을 참고하고 싶다면 그레이스 켈리의 패션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당대 활동하던 스타들인 오드리 햅번, 마릴린 먼로 역시 나쁘지 않지만 오드리 햅번은 50년대보단 60년대 패션이 더 유명한 편이고, 마릴린 먼로의 패션은 현대에 소화할 만한 의상은 많이 보급된 편이라 나머지는 일상룩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다. 켈리는 클래식한 느낌의 슬랙스부터 우아한 레이디 라이크 룩까지 적절히 소화했으므로 쉽게 참고하기 좋다.
배우 생활
모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14시간》에서 단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의 눈에 띄지 못하고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1953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본래 켈리가 맡은 배역은 진 티어니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티어니가 우울증을 겪자 켈리로 교체되었다. 켈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모감보》의 성공은 켈리에게 골든 글로브 상의 영광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눈에 드는 행운까지 안겨주었다. 히치콕은 켈리를 데리고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제작했고, 그 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히치콕의 영화로 인해 우아하고도 차가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이후에도 다작하며 연기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954년에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렇게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그레이스 켈리는 숱한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에 히치콕이 붙여준 별명으로는 "눈 덮인 화산".스캔들의 상대로는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랜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등이 있는데 이 외에도 염문을 뿌린 상대는 더 많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의 상대 역이었던 레이 밀랜드와의 스캔들인데, 당시 밀런드는 켈리보다 22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었고 그 아내가 인맥을 다 동원해 켈리를 밟아버리려 해서 이 스캔들은 켈리의 배우 경력에 치명타를 가할 뻔했다.
추측이지만 켈리가 주로 한참 연상의 유부남 배우들과 스캔들이 잦았던 이유가 엘렉트라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뻘인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 실제로 켈리는 부모에게서 제일 덜 주목받던 아이였다. 훗날 배우 활동을 접으면서까지 레니에 3세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자신의 결혼으로 친정 가문이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거란 생각에서였다는 비화가 있다. 실제로 그레이스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딸이 결혼한다고 데려온 남자만 50명 정도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또한 가족들의 관심을 끌려는 어그로였을 수 있다는 것. 그도 그럴것이 부친은 밥먹듯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며 배우가 꿈인 딸을 공개적으로 비웃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고 모친은 지금으로 따지면 아동학대로 잡혀 들어갈 만한 신체적 폭행을 자식들에게 주저 없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켈리의 부친은 눈에 띄일정도로 첫째 딸 페기를 편애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기는 켈리네 자녀 중에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장 실패한 듯 보인다. 실상이야 어찌 됐든 존 켈리 주니어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에, 가족이 가장 성공하지 못할 인물이라고 여겼던 딸은 할리우드 대스타에 한 나라에 공주까지 됐고, 막내딸은 일찍이 결혼해 해로한다. 하지만 페기는 두 번 결혼했지만 두 번 모두 이혼으로 끝났다. 심지어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딸들 중 한 명은 15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가출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페기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1991년 사망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레니에 2세와 약혼할 당시 이미 한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올레그 카시니(Oleg Cassini). 올레그 카시니는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Grace kelly Look'을 만들어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마가렛 켈리는 유럽 출신의 이미 두 번에나 이혼했던 남자를 반길리 없었고 모친의 극심한 반대로 그레이스 켈리는 패션 디자이너를 떠나 왕자와 결혼한다. 후에 그레이스 켈리는 만약 그와 결혼했다면 얼마나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으며 인생이 바뀔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와의 파혼을 후회하는 어구의 발언을 했다. 나중에 올레그 카시니는 '우린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기 위해 약혼을 했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라며 자서전에 언급했다.
이후 몇 편의 영화를 찍고 또다시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에 케리 그랜트의 상대 역으로 출연했는데, 화보 촬영차 모나코에 들렀다가 일생일대의 전환이 찾아오게 된다. 모나코 공(公)레니에 3세가 켈리를 초대한 것. 이후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 때마침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 《상류사회》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켈리가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면서, 불과 5년여 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1956년 4월 18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1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로 켈리는 주로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라고 불리게 된다. 그녀가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2달러를 선물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비극적 결혼 생활
그러나 세기의 결혼 이후, 실제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켈리는 '배우 생활을 하며 매너를 지키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 따로 배울 것이 없다.'고 했지만, 공가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모나코에서는 프랑스어를 썼는데 켈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서 언어 장벽으로 적응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프랑스어가 미숙했던 켈리는 자녀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대신 가정교사가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공비로서 공가의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또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았다. 레니에는 까다롭고 비위 맞추기 어려운 폭군 타입이었지만 켈리는 신혼여행에서부터 남편의 본성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게다가 시어머니, 시누이 Princess Antoinette와의 갈등도 심했다. 시어머니는 미국의 평민 며느리를 따돌렸고, 시누이는 남동생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켈리 이전 사귀던 여자와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적도 있었다. 그런 시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 시집살이를 꽤나 했다.
결혼 생활도 나빠져 레니에와 그레이스는 각자 바람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판 싸운 레니에 3세는 모나코 내에서 켈리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헐리우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던 차에 1962년에 히치콕이 영화 《마니》에 켈리의 출연을 제안해 왔고 배우로 복귀하려 했으나,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이 도벽이 있는 캐릭터였던 것이 알려지자 품위 문제로 모나코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고 모나코 국민들도 반대해서 결국 무산됐다. 이로 인해 켈리가 출연한 영화는 1956년의 《상류사회》가 마지막이 되었다. 말년에 언론인 바바라 윈터스는 켈리와 인터뷰한 내용을 책에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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