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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인물연구]황희정승 일화, 청백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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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승 (1363년, 고려 공민왕 12년~1452년, 조선 문종 2년)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명재상으로 이름 높은 황희는 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 성균관 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관직을 내던지고 여러 확관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 하였는데, 조선 조정의 간청과 두문동에 은거한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황희는 도승지 박석명의 천거로 승지가 되어 태종을 모시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양녕을 세자에서 폐위시키는 일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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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종 대에 다시 기용되어 육조의 관서를 두루 거치고 삼정승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은 그를 신뢰하여 20년 가까이 정승을 시켰고, 그의 나이가 87세나 될 때까지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 황희는 1452년에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황희의 능력, 조정

영의정으로서 황희는 조정(調整) 능력 면에서 발군의 모습을 발휘한다. 여기서 ‘조정’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세종의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조정’이다. 세종은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고 기존과는 다른 혁신적인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그 자체로 실현 가능한 것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구성원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조직의 추진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시도될 경우에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백성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좋은 제도라고 세종이 고집해 추진하다가 실패한 저화(楮貨·종이화폐)가 대표적인 사례다. <황희졸기>에 따르면 “세종께서 새로운 제도를 많이 만들고자 하시니 황희가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다. 세종이 이를 비록 다 따르지는 않았지만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다”고 돼 있다. 여기서 황희의 반박이 허조처럼 세종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실록>을 보면 황희는 “좋은 계책이지만,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를 보완하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훌륭하신 뜻이기는 하나 ∼된다면 그 폐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제도를 유지하소서” 같은 형식을 취한다. 그는 오랜 행정 경험과 육조의 책임자를 모두 거친 경륜을 바탕으로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고 안정적이고 매끄럽게 국가의 사업들이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의 이상(理想)에 대한 견제와 보완을 통해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힘을 얻어 구현돼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세종도 이런 황희 말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인다. <세종실록>에 많이 나오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 “황희의 의견에 따랐다”다.

 

다음으로 신하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한다는 의미에서의 ‘조정’이다. “그래 너도 옳고, 그래 너도 옳다”는 유명한 황희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황희는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차이를 좁히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에 탁월했다. 어느 날 세종이 “내가 명령한 일에는 서로들 논박하면서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왜 육조에서 올라오는 일에는 별다른 의논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황희가 “전하께 상신하는 일에 (신하들 사이에) 합의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면 다시 조정해 신 등의 의견이 모두 합치된 후에야 이를 올립니다. 그래서 다른 의논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16 영의정으로서 백관을 통솔하며 다양한 의견과 갈등을 조화롭게 조정시켜나갔던 것이다.

 

황희 정승의 일화

 

1) 황희 정승과 두 마리 소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황희 정승 중에는 훌륭한 정승이 되었지만 젊었을 때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도 많았다. 황희가 벼슬아치들의 미움을 받아 잠시 쉴 때 일이다. 황희는 이 기회에 전국 유람이나 하여 견문을 넓히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남쪽 어느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는 마침 모내기 시기라 들판에는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황희는 땀을 식히려고 나무 그늘에 들어가 앉았다. 그런데 맞은 편 논에서 늙은 농부 한 사람이 누렁소 한 마리와 검정 소 한 마리를 부려 논을 갈고 있었다. 황희는 한참 구경하다 그 농부가 가까이 오자 물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그러자 늙은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가 있는 그늘까지 올라오더니 황희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렁 소가 더 잘 하오.” 황희는 농부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만한 일을 가지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오시오. 또 귓속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늙은 농부는 이 말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두 마리가 다 힘들어 일하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더 잘한다고 하면 못한다고 하는 쪽의 소는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소?” 황희는 농부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큰절을 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였다. 이 후 황희는 죽을 때까지 남의 단점이라고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 날 까지 훌륭한 정승으로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2) 황희 정승과 한명회

 

황희 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먼저 한 종의 말을 다 듣고는 "네 말이 옳다" 라고 하고, 다음에 다른 종의 말을 듣더니 "네 말도 옳다" 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어찌 이말도 옳고 저말도 옳다 하시나고 그의 무정견을 나무라자 "부인의 말도 옳소" 라고 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황희 정승은 겸허하고 관후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다.

이에 비하여 한명회는 그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언제나 어질고 현명한 명재상의 표본으로 칭송되나, 한 사람은 권모술수에 능한 대표적인 신하로 잘못 회자되었다. 한명회와 황희는 둘 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에까지 올랐으나 인생역정은 이처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황희는 태평성대인 문화통치기의 재상이었고 한명회는 의정부 중심의 합의제를 타파하고 쿠데타와 개혁으로 점철된 강력한 왕권체제하의 재상이었다.

 

황희 정승은 항상 눈에 띄지 않게 보필했으나 한명회는 적극적으로 실력자에게 스스로 나아가 그를 앞질러 헤아리고 처리해간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안정의 시대인 세종조의 찬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황희 정승이 있었고, 변화와 개혁의 시대인 세조때는 언제나 한명회의 역할이 있었다.

 

3) 황희 정승과 맹사성

 

높은 관직에 있던 맹사성이 상복 차림으로 길을 가다가 용인의 한 누정에서 황의헌이란 젊은 선비를 만났다. 황의헌은 뒷짐을 지고 현판에 적혀 있는 시를 읊고 있었다. 그는 맹사성의 누추한 모습을 흘깃 보더니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영감이 어찌 이 흥취를 알겠소.”

 

그러나 맹사성은 겸손한 몸짓과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늙은 시골뜨기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저 글의 뜻이 무엇인지요?”

 

“선현들이 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 흥에 겨워 묘사한 글이오.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 표주박을 가지고 천리강산 들어가니, 산은 높고 골 또한 깊기만 한데, 두견새만이 난잡하게 우는구나. 구름은 뭉게뭉게 산봉우리 꼭대기에 내려, 가지가 휘휘 늘어진 커다란 소나무에 서려 있고, 바람은 살살 불어 시냇가 돌 위에, 꽃송이만 흐들흐들 떨어뜨린다. 그곳 경치가 너무나 좋아, 다른 세상이로되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니니, 놀고 갈까 하노라……. 뭐 이런 뜻이오!”

 

황의헌이 잘난 척을 하자, 맹사성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것 참 좋습니다. 선생을 이곳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이렇게 좋은 글귀를 들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맹사성이 비를 피해 누정에 올랐다는 기별을 받은 현감과 아래의 관속 등이 우르르 몰려나와 누정 앞에 죽 늘어섰다. 보잘것없는 노인을 극진히 대하자, 황의헌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옆 사람에게 슬쩍 물었다. 그러자 자신이 만난 노인이 당대에 이름 높은 정승이라고 했다.

 

황의헌은 기겁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맹사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귀천에 상관없이 의지가 가장 소중하오. 선비는 사람을 오만하게 대하려는 마음이 있었소. 그래서 나는 틀림없이 선비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로 알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도도하던 사람이 지금은 어찌 이다지도 비굴하게 군다는 말이오.”

 

맹사성은 오히려 황의헌을 위로하여 보냈다.

 

이 일과 더불어 청백리의 대명사로 단벌 정승이었던 황희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영의정 황희의 옷은 늘 단벌이었다. 어느 겨울날, 궁궐에서 돌아온 황희가 부인에게 젖은 바지를 뜯어서 말려 달라고 했다.

 

“밤새 말리고 새벽녘에 꿰매면 내일 아침 입궐할 때 입을 수 있을 것이오.”

 

부인이 옷 한쪽을 뜯자마자, 대궐에서 속히 입궐하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황희는 하는 수 없이 뜯어진 바지를 관복으로 가리고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세종 임금은 중신들을 불러 모아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 대책을 논의하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세종 임금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튀어나온 하얀 것이 보였다. 세종 임금은 그것이 양털인 줄 알고, 청렴하기로 소문난 황희가 양털 옷을 입다니 참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회의가 끝난 후 세종 임금은 황희를 불렀다.

 

“과인이 듣기로 황 정승의 청렴결백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 하늘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 옷을 입으셨소?”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것은 양털이 아니고 솜입니다.”

 

“솜? 왜 솜을 걸치고 다니시오?”

 

“신은 겨울옷이 단벌인데 바지가 젖어서 손질하는 도중에 어명을 받고 급히 달려오느라…….”

 

세종 임금은 너무 놀라 황희에게 당장 비단 열 필을 내렸다. 하지만 황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하, 어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계속된 흉년으로 지금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어찌 이런 때에 영상의 몸으로 비단을 걸칠 수 있겠습니까? 솜옷 한 벌로 충분합니다.”

 

세종 임금은 용포를 걸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명을 거두었다. 맹사성과 황희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목민관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황희정승은 ‘청백리’가 아니었다?

황희는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명재상이었다. 세종대왕을 도와서 중흥기를 이끌었으니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 할만하다. 이러한 황희정승께는 역사적 사실 외에도 많은 일화가 민간에 전해져 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 두마리 중 어느소가 일을 더 잘하냐고 농부에게 물었던 이야기, 종들의 자식이 버릇없이 굴어도 다 받아주었다는 이야기, 세종대왕께서 황희정승의 집에 들렸는데 멍석에 누워있었다는 이야기 등일 것이다.

 

KBS역사스페셜의 세종대왕편을 참고하자면(또 다를도 있겠지만) 실제의 황희는 지금의 파주지역의 땅이 거의 황희정승의 것이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즉,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빈궁하게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의정부사 황희 졸기(卒記)’에 보면 그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비판을 받았다”고 돼 있다. 주로 청탁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고”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는 대사헌을 겸하고 있던 세종 7년, 남원부사로부터 유지(油紙)로 만든 안롱(鞍籠·수레나 가마 등을 덮는 우비)을 받았다가 자수했으며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세종 9년에는 소위 ‘서달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자신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신창현의 고을 아전을 때려 죽인 일이 벌어지자 사건을 덮어달라고 우의정 맹사성을 통해 해당 고을 수령에게 청탁했다가 진상을 재조사하도록 지시한 세종의 명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 투옥된 것이다. 세종 12년에는 관리 소홀로 말 1000마리를 죽게 만든 감목관(監牧官·목장 관리 책임자) 태석균의 죄를 완화시켜주려고 형조에게 사적으로 부탁을 했다가 “법을 맡은 사람과의 사적인 인연을 기회로 공공연하게 청탁을 행한다”며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의정으로 임명되기 몇 달 전인 세종 13년 4월에는 교하현감에게 관의 소유인 둔전을 달라고 요청해 얻어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크게 망신을 당한다.

 

황희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문제를 일으켰다.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의 재물을 훔치다 발각됐고, 이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도 함께 재물을 착복한 것이 드러나 처벌을 받았다. 이어 황보신의 형인 황치신이 죄를 지어 몰수되는 아우의 기름진 과전을 자신의 과전과 바꿔치기하다가 걸려 파면된다. 재산 문제로 잡음이 많았던 것은 막내아들인 황수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세조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까지도 탐하고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고 <실록>에 기록됐다.

​다만 황희가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후대의 권문세가 처럼 넘치는 사치를 하며 자기자신의 부와 영달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과 또 당시의 수많은 훌륭한 신하들과 아울러 자기자신이 아닌 바로 백성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로부터 그같은 칭송을 듣고 다소 과장된 야사까지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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