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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by hlee100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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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1. 해리 왕자는 누구인가?

 

1984 9 15 출생, 왕위계승 서열 3위인 그는 모범생인 윌리엄 왕자에 비해서 말썽꾸러기라고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으며 2005 5 영국 육군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 입학했다. 2006 4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해리는 소속 부대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분쟁지역에 배치된다면 기꺼이 동료와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그러나, 왕실과 정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른 의무)' 다하겠다는 해리의 충정은 이해하지만 생명이 위협받는 위험지역에 왕위 계승 3위인 그를 보낼 없다는 입장이어서 귀추가 주목됐다.

 

, 해리는 생모인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생전에 벌였던 자선사업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프리카 레소토의 고아를 돕기 위한 '센테발레 자선재단(www.sentebale.org)' 창설했다그는 2006 7 17 윈저시에서 열린 폴로 경기 마구간에 들어가 소변보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돼 망신을 샀다. 각종 해외 사이트에는 해리 왕자가 옆에서 소변보는 장면과 일을 마친 걸어나오며 바지 지퍼를 올리는 사진이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2007 4 30 영국의 육군 당국은 그간 안전 문제로 논란을 벌여온 해리 왕자의 이라크 파병과 관련, 예정대로 이라크로 보낼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이라크 무장세력이 해리 왕자를 납치해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가한지 사흘만인 2007 5 17 국방부는 이라크에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그래서 해리왕자는 차선책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택해 복무했으나 2008 3 아프가니스탄에서 언론에 노출돼 10 만에 조기 귀국했다.

 

[해리 왕자] 해리 왕자 어린 시절, 결혼 배우자, 왕실의무 포기 이유 정리

 

웨일스 공작 부부(찰스 왕세자-다이애나 왕세자비) 사이에서 해리 왕자는 1984 태어났다 왕자는 1984 9 15 패딩턴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헨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해리라는 이름을 썼다

 

해리 왕자의 네임은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마운트배튼-윈저(Henry Charles Albert David Mountbatten-Windsor)'. 미들 네임이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개다서식스 공작(해리 왕자의 공식 작위) 언론의 주목 속에서 살아왔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어린 시절부터 파티를 즐기던 10, 군대에 있을 때도 언론의 관심은 그를 따라다녔다군에서 나온 해리 왕자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자선 활동을 했다. 결혼도 했고, 아버지가 됐다.

 

그런 해리 왕자가 이제 아내와 함께 인생의 장을 열려 하고 있다. 왕실의 의무와 "전하"라는 칭호를 비롯해 공적 지원을 포기한 . 그리고 여생의 대부분을 캐나다에서 보내리라 예상된다해리 왕자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생활의 균형을 맞추려 해왔다. 왕위 계승 서열 6위라는 점은 자선 활동에 대한 지지를 얻을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친 관심에 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때도 있었다.

 

아기 아치와 아버지 해리 왕자의 패밀리 네임(family name)으로 쓰인 마운트배튼-윈저 해리 왕자의 공식 직함(official title)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Sussex, Earl of Dumbarton and Baron Kilkeel이다 ‘왕가의 자손이며, 서식스의 공작이며, 덤바턴의 백작이며, 카일킬의 남작’이 공식 직함이다그래서 해리 왕자에 대한 영어 기사들은 대부분  ‘서식스의 공작 해리 왕자’로 표시한다.

 

해리 왕자의 아들 아치는 작위가 없다. 원래 왕족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이 가진 작위 하나를 물려주기 때문에 아들 아치에 덤바턴의 백작 작위를 물려줄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하지만 해리 왕자는 아들에게 아무 작위도 물려주지 않았다. 아들 아치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 있다원칙적으로 할아버지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되면 3대손인 아치는 왕자, 프린스(prince) 있다하지만 만약 아버지 해리가 아들 아치의 프린스 작위를 거부하면 아치는 프린스가 없다또한 2021 영국 해리 왕자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둘째 딸을 출산했다.

 

해리 왕자 부부 대변인은 아이 이름이 릴리벳 '릴리' 다이애나 마운트배튼-윈저라고 공개했다. 영국 왕실 가족 가운데 왕위 계승 서열 최상위권이면서 해외에서 태어난 경우는 릴리가 처음이다이어 "릴리는 증조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어린 시절 애칭인 릴리벳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다이애나는 사랑을 받았던 아이의 할머니 ()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기리기 위해 선택했다" 설명했다릴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11번째 증손자이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은 8위다.

 

 

 

2. 해리왕자가 영국왕실을 나온 이유

 

그의 왕실에 대한 반감, '이방인' 의식의 근원은 어머니 다이애나다. BBC 인터뷰에서 당시 다이애나는 "나는 왕세자의 외떨어진 아내였다. 나는 골칫덩이였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왕실 생활의 속살을 드러냈다. 그런 환경에서도 다이애나는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줬다고 한다. 다이애나의 사진 한장은 지금으로 치면 수백만 원을 호가했다. 왕자도 피해갈 없었다. 다이애나가 동영상을 찍고 있는 파파라치를 직접 찾아가 "애들을 보호해 달라" 간청하는 장면은 지금도 다큐멘터리 속에 남아있다 왕자와 함께 디즈니랜드를 방문해 다른 사람들과 섞여 줄을 서고, 놀이기구를 일화도 유명하다. 평범한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던 왕실 사람들과 달리 다이애나는 왕자가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교육했다해리는 그런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

 

2019 부인 마클과 생후 4개월 아들 아치와 함께 외국 여행을 떠났을 때도 22 다이애나가 걸었던 흔적을 되밟았다. 1997 다이애나가 대인지뢰 사용을 반대하며 걸었던 아프리카 앙골라의 지뢰밭 길이다.

 

해리는 '왕실 이단아' 비극적 운명이 부인 마클에게서 재연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왕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고 심지어 아버지 찰스 왕세자는 자신의 전화를 피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형인 윌리엄 왕자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에서 그는 "(윌리엄) 아주 사랑하지만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했다.

 

해리가 마클에게 다이애나를 투영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마클의 결혼 반지도 다이애나의 것을 자신이 다시 디자인해 선물했다. 영국 언론도 마클을 자주 다이애나와 비교했다. 배우 출신으로 이미 '셀럽'인데다 자선활동에 관심이 많고 패션 감각이 특출 나다는 공통점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부인이 영국 언론의 공격, 왕실의 냉대를 받을 때도 해리는 전적인 마클 편이었다. 다이애나는 출산 직후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왕자를 안고 카메라 앞에 섰지만, 마클은 이를 거부해 비난을 받았다. 해리는 마클을 지지했다마클 역시 파파라치와 영국 타블로이드 매체에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될 해리는 치를 떨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같다"면서다. 가장 많은 파파라치를 몰고 다닌 21세기 '셀럽' 다이애나는 파파라치로부터 도망치다 사망했다.

 

해리는 마클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자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왕실 엑소더스' 결정했다영국 왕실에서 전통과 관례에 반기를 들고, 금지된 사랑에 목숨을 걸었던 해리만이 아니다가장 앞서 거론되는 인물은 해리의 증조할아버지인 조지 6세의 친형, 에드워드 8세다에드워드 8세는 독신 상태로 즉위한 1년도 되지 않아 왕위를 포기했다. 미국 출신의 이혼한 여성 윌리스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다. 왕세자 시절 사교적인 성격과 풍부한 교양으로 '왕관의 무게' 능히 견딜 만한 인물이라 평가받은 그였다. 사랑을 이룬 대신 왕실의 일원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까지 이루지는 못했다. 평생 왕실 주위를 맴돌았다.

 

번째 인물은 해리의 이모할머니 마거릿 공주다. 엘리자베스 2 여왕의 동생인 마거릿 공주도 16 연상의 이혼한 남성인 피터 타운센드를 사랑했다.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평생 방황하는 모습을 엘리자베스 2세는 처음 사람의 사랑에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의 반대에 부딪히자 태도를 바꿨다. "영국과 영연방 교회의 수장으로서"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거릿 공주는 이후 사진작가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와 결혼하기도 했지만 평생 언니인 여왕의 그늘에 갇혀 방황했다. 마거릿 공주도 에드워드 8세처럼 의미 있는 역할을 맡길 원했다. 하지만 "나눠줄 역할이 없다" 엘리자베스 2세의 결정에 후반기까지 인생을 무료히 여겼다.

 

다이애나비 역시 윈저 왕가의 '금지된 사랑' 희생자였다. 해리의 아버지인 찰스 왕세자는 앞선 사례들을 보며 적합한 결혼 상대를 찾아 귀족 출신의 다이애나와 결혼했다. 하지만 찰스와 연인 카밀라 파커 볼스는 각각 결혼한 상태로 관계를 이어갔다. 다이애나가 이혼 BBC와의 인터뷰에서 "(셋이 함께 있으니) 북적거리는 결혼 생활이었다" 말한 이유다.

 

아들 해리도 미국 출신의 이혼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해리는 가문에 흐르는 상처의 덕을 봤다. 시대가 바뀐 탓도 있지만 그간 모든 스캔들을 지켜본 엘리자베스 2 여왕은 이들의 결혼을 축복했다그렇다고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아니었다. 인종 차이라는, 왕실 기준의 '핸디캡' 하나 있었던 것이다. 마클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유색인종인 탓에 왕실 내에서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왕실에 결정적 '반기' 해리 왕자의 향후 어떤 행로를 겪게 될까. 앞서의 '이단아'들처럼 왕실의 그늘에 짓눌려 평생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될까해리에게는 나름대로 계산기를 두드린 결행한 흔적이 보인다.

 

BBC 따르면 2014 해리가 서른 살이 되던 다이애나가 남긴 신탁기금의 가치는 1000 파운드( 158)였다. 인터뷰에서 "왕실에 남은 어머니의 재산을 가져가겠다" 말했다. 해리 부부는 왕실 교부금으로부터 독립한다고 밝혔지만 아버지로부터 얻은 재산은 포기하지 않을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처음 거주지로 캐나다를 택한 것도 무작정 반기를 아니라는 징표다. 캐나다는 엘리자베스2세를 군주로 삼는 동군연합 영연방이다. 이곳의 군주제 지지자들은 해리를 엘리자베스2 사후의 왕으로 옹립하자는 주장을 10 전부터 했다. 캐나다 내에서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화제를 택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자 이런 여론을 불식시키는 방법으로 당시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던 해리를 모셔오자고 주장한 것이다.

 

인터뷰 이후 여론도 해리 부부에게 우호적이다. 인종차별이라는 민감한 이슈를 폭로하면서 미국은 물론 왕실에 우호적이던 영국 언론마저 쪼개진 상태다. CNN "인터뷰에서 드러난 사건들은 왕실이 21세기를 사는 대다수 보통사람이 겪는 문제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평했다장례에조차 일주일 가까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를 냉대했던 할머니다. 해리는 그런 할머니가 25 시절부터 94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지켜온 '왕실' '군주제'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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