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 인문학 (Humanities)/4. 사회인문 (Social humanities)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9. 30.
반응형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철학자 강신주가 묻는다. “당신은 주인의 삶, 부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의 말을 듣기 위해 절에 가고 경전을 왼다. 그러나 절에 자주 간다고 해서, 경전을 잘 외운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불교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기보다 자비심을 갖고 살게 해달라고 비는 종교다. 자비심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깨우친 수행자의 말을 들어도 스스로 온몸으로 깨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팔만대장경을 머릿속에 넣고 수없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육바라밀을 지키는 것과는 또 다르다. 여러분은 부처가 돼 사찰에 오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의 집이 사찰이 돼야 한다.

반야바라밀, 경전 암송을 예식 때마다 계속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경전을 외워 가르침을 얻는 것과 진정한 자비를 실천하는 것, 사실 이 간극에 있는 게 가장 어렵다. 선재동자가 부처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자가 글을 알겠나 뭘 알겠나. 서울대 출신 교수가 성추행하는 것을 뉴스로 보지 않았나. 많이 안다고 해서 잘 사는 것, 훌륭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무지렁이로 태어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진짜 보살에 가깝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말로 하는 자비 말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진짜 자비고 부처다.

언어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말은 우리를 ‘했으니 됐다, 했으니 안다’는 정신의 승리, 착시 효과로 이끈다. 가령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진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은 영혼 없는 거짓말이다. 진짜 사랑을 하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님한테도 “엄마 죄송해요. 바빠서 연락을 못했어요” 하지 않는가. 다 거짓말이다. 사랑을 하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직접 찾아가 어깨를 두드리고 안마를 하고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글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 경전을 외우고 숙지하는 것은 결국 언어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짜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불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불교 신자가 되려면 갇히지 않아야 한다. 구속되지 않는 마음,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자가 돼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의 말을 그래서 사자후(석가모니 목소리)라고 하는 거다. 그러나 불교 신자들은 사자가 아닌 고양이가 돼버린다. 자유로운 마음을 얻은 사자가 된 스님이 제자가 깨달음을 얻은 사자인지 그저 얌전한 고양인지 알아보기 위해 던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화두다.

여러분께 화두를 하나 던져보겠다. 1500년 전 스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제자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나. ‘정월에 동백꽃’이었다. 이 대답을 들은 스님이 제자에게 이제 사자가 됐으니 내려가라 했다. 깨우쳤으니 하산하라는 것이다. <벽암록>에 나온 이야기다. 여러분께 질문해보겠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지금 ‘정월에 동백꽃’이라고 답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정월에 동백꽃’은 <벽암록> 제자의 답이고 여러분의 답은 어디 있나. 선문답 같지만 이런 것이 화두다.

또 다른 화두를 던져보겠다. 주장자(柱杖子, 지팡이)를 든 스님이 어느 날 제자한테 문제를 냈다. 제자에게 주장자를 보이며 “이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 해도 맞고, 없다 해도 맞고, 침묵을 해도 맞을 것이다” 했다. 여러분들이 한번 답해보라. 있는가 없는가. 대답 못하지 않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 순간, 언어와 논리에 갇힌 것이다.

<무문관(無門關)>은 이러한 화두를 정리한 책이다. 중국 송나라 무문 혜개스님이 중국 선종에서 전해 내려오는 화두 900개를 48개로 간추린 것이다. 무문관은 말 그대로 문이 없는 관, ‘gateless gate’다. 접미사 ‘less(없다)’가 붙은 대로 해석하자면 ‘문 없는 문’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이 힘들면 문을 찾는다. 어딘가에 갇혀있으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문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고 한다.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통도사 말사에 무문관이라는 참선공간이 있다. 참선하려는 사람이 들어가면 스님이 문을 잠근다. 밥도 배식구에 준다.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있을 수 없으니 내보내 달라고 하면 된다. 참선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 스님 한분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기도 했다.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 서구 과학의 세계와는 다르다. 문에 집착하는 사람은 문을 찾지 못한다. 문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만이 문을 나갈 수 있다. 무문관에서 문을 찾으려는 사람은 나가지 못하고 문이 없는 것, 공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자같은 사람은 문을 나간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이란 말이 있다. 싯다르타 세존께서 영취산에서 설법을 베풀 때다. 대중들에게 고통과 집착에 대해 설하던 중 갑자기 싯다르타가 꽃을 들었다. 그러자 많은 제자 중 가섭만이 웃었다. 싯다르타가 이를 보고 가섭에게 “네가 사자가 됐다”, 곧 깨우쳤다 말했다. 가섭은 왜 웃었을까. 그리고 싯다르타는 가섭에게 왜 “깨달았다” 했을까.

생각해보시라. 큰스님이 심각한 내용으로 격렬히 법문을 하다가 갑자기 꽃을 들었다. 여러분은 “꽃을 왜 들었지?” “무슨 의미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스님의 손에 든 꽃의 모습은 정작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자승 하나가 길가를 지나다 들가에 핀 잔꽃을 꺾어 들고 가는 모습을 생각해봐라.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르지 않겠나. 여기서 차이가 생긴다. 가섭은 동자승이 꽃을 들어도 싯다르타 앞에서처럼 웃었을 것이다. 누가 꽃을 들었는지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또한 상대보다 당당하고 스스로 주인이라 생각하면 꽃의 예쁜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꽃이 있어도 예쁜 줄 모른다. 꽃을 보고 있는데 꽃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가 대통령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꽃이 그 자체로 예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은 부처님과 다름없다.

옛날 중국에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려 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지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출타해 암자를 비운 사이 어떤 사람이 찾아와 법문을 청했다. 남아있던 제자는 일지스님처럼 손가락 하나를 세워 법문을 대신한 뒤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암자로 돌아온 일지스님이 이를 알고 제자에게 손가락을 내어보라고 한다. 스님은 그 즉시 제자의 손가락을 칼로 베어 버린다. 잘린 손가락에 제자가 놀라 문을 열고 나가려하자 일지스님이 묻는다. “이놈아 어떤 것이 네 손가락이냐?” 제자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일지스님이 던진 화두는 무엇일까.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손가락까지 자른 건 무자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거다. 이를 잔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진짜 불교 신자가 아닌 거다. 제자가 든 손가락은 제자의 손가락이 아니다. 스승의 손가락이다. 스승이 자기 손가락을 자른 것인데 뭐가 잔인한가.

여러분도 이제 여러분의 손가락을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 흉내내지 마시라.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가락을 들면 칼로 베여도 잔인하다고 할 수 없다. 일례로 맛집도 안가고 맛있다고 하거나 직접 먹어봤는데 맛이 없으면서도 맛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 이는 거짓이다. 강연 시작하기 전 여러분들이 올린 절은 여러분 스스로가 한 절이었는지 지금 이것부터 고민하시라.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유명한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佛性, buddhat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선한 품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한 마디로 불교의 가르침을 불신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에게도 과연 불성이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지요. 물론 당시 동아시아 대승불교계에서는 일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합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일승(一乘, ekayāna), 그러니까 모든 존재를 하나의 수레로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선한 품성이 전혀 없는 존재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일천제가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에게는 이미 불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일천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셈이 됩니다. 사실 일천제가 아니어도 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즉 중생(衆生, sattva)에는 좁게는 마음과 욕망을 가진 인간만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모든 생명체들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논의가 복잡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하면 다람쥐 부처, 뱀 부처, 혹은 말라리아모기 부처 등등도 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불성과 관련된 논쟁에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불성 논쟁을 주도했던 것은 교종(敎宗), 특히 천태종(天台宗)의 이론가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다른 경전, 특히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과 같은 경전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이 속출합니다. 그러니 논쟁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지적인 논쟁으로 수행자들은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치열한 수행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등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적인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서로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면 수행자들은 사실 자비를 마음에 품은 불교도이기는커녕 권력욕에 취한 정치가나 이데올로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한심한 일이었지요. 자비를 실천해야 할 수행자들이 오히려 가장 무자비한 비난과 독선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이럴 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선종(禪宗)이 등장한 겁니다. 그렇지만 선사들도 불성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건 선사들이 불성 논쟁에 뛰어들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사들을 스승으로 찾아온 수행자들이 자꾸 물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선사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불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선사들은 불성에 대한 제자들의 이론적 집착을 부수는 방향으로 문답을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개에게도 불성은 있는가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전등록(傳燈錄)’을 보면 흥선(興善, 755~817) 스님과 그의 제자 한 명 사이에 일어났던 불성과 관련된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묻자, 흥선 스님은 “있다(有)”고 대답합니다. 이 순간 제자는 흥선 스님이 ‘열반경’의 일승 사상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확인삼아 제자는 흥선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그럼 화상께서는 불성이 있으십니까?” 아마 제자는 “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흥선 스님은 제자로서는 경천동지할 대답을 합니다. “내게는 불성이 없다.” 당연히 제자는 당혹감에 물어보게 됩니다.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로 화상께서는 혼자 불성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흥선 스님의 대답은 압권입니다. “나는 일체중생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일체중생이 아니라면, 흥성 스님은 이미 부처가 된 겁니다. 이미 부처가 된 사람에게 불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얼마 뒤 조주(趙州, 778~897)에게도 불성이란 개념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던 한 명의 제자가 찾아듭니다. ‘조주록(趙州錄)’에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조주는 “없다(無)”고 대답했다. 스님은 물었다. “위로는 여러 부처들, 아래로는 개미까지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개에게는 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조주는 대답했다. “그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업식(業識)은 집착을 낳는 근본적인 의식, 알라야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업식성이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겁니다. 결국 업식성은 불성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과 세상을 보려면,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만들어진 습관적 무의식을 제거해야만 하니까요. 그러니까 습관적 무의식이 작동한다면,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부처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습관적 무의식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이 되어 태양빛으로 녹아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다릅니다. 당연히 깨달은 자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자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흥선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했고, 조주 스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두 스님이 같은 걸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중생심을 부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 즉 정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일이니까요. 흥선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처럼 깨달은 사람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불성이란 개념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나 혹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바탕을 가리키니까요. 이미 실현되었다면 잠재성이니 바탕이란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조주 스님은 개에는 불성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업식성이 있다면 불성이 있어도 부처는 될 수 없다고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조주 스님은 지금 우리가 반드시 끊어야 할 업식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주 스님은 우리에게 불성이니 뭐니 이야기하지 말고 업식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며 되묻고 있습니다. ‘네게는 업식성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전자라면 아직 부처가 아니고, 후자라면 부처가 된 겁니다.

 

주인 되려면 반드시 ‘무’ 통과해야

[철학]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의 '부처의 삶'

조주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면, 이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불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업식성이 있기는 개나 우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조주 스님의 통찰은 흥선 스님보다 더 매력적인 데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건 깨달은 자나 깨닫지 못한 자 모두에게 불성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업식성이 작동한다면, 불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현될 수도 없는 불성이란 개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없다고 해도 되지요. 반대로 업식성이 소멸되어도, 불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개념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었는데,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개에게만 불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처에게도 불성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주 스님의 “없다(無)”라는 사자후는 개를 넘어 우리 인간을 휘돌아 저 멀리 깨달음에 이른 부처에게까지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無門, 1182~1260) 스님이 조주의 ‘무자(無字)’, 즉 ‘무’라는 글자에 주목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有)’는 교종의 가르침도 ‘무’라는 글자로 날려버릴 수도 있고, 불성 자체가 치열한 깨달음의 과정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고 있던 일부 제자들의 집착을 ‘무’라는 글자로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말해 일개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의 권위에도 굴복하지도 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불성이란 개념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 스님이 ‘무문관’의 첫 번째 관문으로 조주 스님의 ‘무’라는 글자를 앞세운 이유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무문 스님은 첫 번째 관문을 풀이하면서 이야기했던 겁니다. “다만 하나의 ‘무’라는 글자일 뿐이니, 이것이 선종의 첫 번째 관문이다. 그래서 ‘선종 무문관’이라고 부른 것이다.”


과거 선사들의 48가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무문관!’ 의미심장한 말 아닙니까. ‘문이 없는 관문’입니다. 문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통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문이 없으니까요. 반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통과하기 쉬운 관문이지요. 문이 없으니 통과할 필요도 없고, 이미 통과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문에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경전의 권위일 수도 있고, 불성과도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스스로 주인이 되려면 반드시 부정해야 할 대상이니까요. 그래서 무문 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로 조주의 무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위대한 자유를 얻게” 될 테니까요.

 

강신주 박사는 …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연세대 대학원에서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철학이 필요한 시간>,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을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며 에둘러 말하지 않는 ‘돌직구 상담’으로 대중과 소통하며 ‘거리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