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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4. 사회인문 (Social humanities)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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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 당대 최초로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道)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인물이다. 대표 저서로는《도덕경》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의 창시자로 불린다. 도교에서는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고 부른다.

 

허난 성 루이 현의 사람 노자(老子)는 주왕을 섬겼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 만물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이다. 그는 길을 찾았다. 그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도(道)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老子)는 기원전 604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후로 약 700년 뒤인 기원후 90-100년경에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으니'라고 요한복음서 1장 1절이 등장한다.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우주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 역시 길(道)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는 천지(天地)보다도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이법(理法)이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의 영위(營爲)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 하였다.

 

노자의 사상은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무위자연'과, '권력과 재산을 더 가지려고 무리하게 애를 쓰지 말라'는 '공수신퇴'로 요약되는데, 이는 《노자 도덕경》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장에서 쓴 처세술임을 알 수 있다.

처세술을 요약하자면, '남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고, 나를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아라'는 뜻이며,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힘을 '매번' 100% 쓰지는 말라는 것이 된다. 인생의 꼭대기(peak)를 만들어 놓으면 내려갈 일밖에 없으므로, 70~80%의 힘으로 오래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 참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을 잡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줄도 알고, 가진 게 많으면 주변에 적당히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고 노자는 조언한다.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도덕경' 철학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長)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갖추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強)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문명과 나를 내세우지 않고 뭇 세상과 조화롭게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의 방식을 권한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道는 노자, 장자 등 이른바 道家의 전유물이 아니고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들 사이에서 상용되던 단어이다. 道의 개념 내지 의미는 학파와 사상가에 따라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나지만 대체로 정치, 윤리, 전쟁, 인생, 우주 등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도는 有의 사건으로부터 추상되는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의 道는 無이다. 無를 단순히 有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有이므로 無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無를 알았을까? 도덕경은 聖人이 無를 알아가는 旅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때 聖人은 단순히 無를 알아가는 여정에 오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독자를 聖人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도덕경의 목표이다.

 

無는 有가 아니므로 聖人에게 무엇인가 ‘어두운 존재’로 다가온다. 이에 聖人은 무에 투신(投身)함으로써 ‘無의 운동’을 일으키고, 이를 통하여 無에 동화되고 無를 닮고 無를 안다. 따라서 無를 아는 것은 無의 운동의 결과이다.(1장 玄之又玄) 無의 운동은 無知無欲과 無爲로 이루어진다. 無知는 無를 지향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無로부터 끊임없이 玄의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며, 無爲는 그 깨달음이 성인의 일상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玄은 無에서 비롯하는 새로운 자아로서 굳이 정의하자면 ‘無에서 나온 無’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과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有를 하는데, 이때 의지는 경험과 이성을 이끄는 주체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경험과 이성으로는 無를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無를 알기 위해 오히려 경험과 이성을 부정(否定)하고 그 결과 의지까지도 부정한다. 이때 聖人은 단순한 ‘나’로 머물면서 無 안에 잠기게 된다. 聖人은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얻고 이로써 無를 안다. 이런 이유로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無知라고 한다. 이때 성인은 욕구(欲)로부터 초연한 새로운 자아(玄)의 깨달음을 얻는데(1장 常無欲以觀其妙) 그 無欲의 깨달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노자는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道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노자의 道는 확실히 사람과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누는 ‘神的인’ 존재이다,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無知는 聖人이 道를 사랑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道가 聖人을 사랑하는 활동이다. 이 두 활동은 동시적인 사건으로서 하나의 짝을 이루기 때문에 둘을 함께 묶어서 無知無欲(2장)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道를 사랑하면 道는 반드시 그를 사랑한다.

 

無知無欲의 활동이 聖人의 삶으로 드러난 것을 無爲라고 한다. 聖人은 無知無欲에 근거하여 無爲를 실천하는데 이것은 그가 얻고 있는 신적인 자아(玄)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無爲自然의 自然은 바로 이 신적인 본성을 가리킨다. 聖人은 욕구에 일방적으로 복종하거나 규범으로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욕구를 다스린다.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천하와 만물을 완전하게 다스리는 결과를 낳는다. (10장 愛民治國)

 

道德經의 德은 無知無欲과 無爲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다. 德은 또한 ‘道를 실천하는 일(行)’이다. 無知無欲이 道의 뿌리라면 無爲는 道의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69장 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無知無欲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無爲를 실천할 수 없다. 聖人은 無知無欲의 內的 운동을 우선한다. 無爲自然의 外的 활동은 내적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無知無欲을 거들떠보지 않고 無爲自然을 찬미하지만 물론 모두 공염불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경험과 이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無의 운동은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므로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노자는 부득이하게 比喩(parable)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대부분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도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無의 운동은 매우 쉽고 단순하며(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無의 운동을 통하여 모든 비유의 의미가 저절로 밝혀진다.

 

지금 말하는 비유는 직유(simile), 은유(metaphore), 상징(symbolism), 類推(analogy), 寓話(allegory) 등 우회적 표현법을 모두 포함한다. 비유를 풀어내려면 반드시 道를 실천해야만 한다. 따라서 道를 실천하지 않고 도덕경을 해석하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道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道의 실천을 도외시하고 무모하게도 道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이 내놓은 도덕경 해설서들 중 그 어떤 것도 도덕경 전체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며 그나마 내용의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 도덕경의 비유는 그 자체로 독자들이 道를 실천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도덕경 2장. 유무상생. 서로 대립되는 것이 서로 돕는다.

유무상생은 무위와 더불어 노자의 핵심 사상입니다. 다음은 노자 도덕경 2장의 일부입니다.

<출처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도 듣는 도덕경>

 

이 세계는 대립쌍들(유/무, 고/저, 장/단, 상/하)이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무와 유와 같은 대립 요소가 서로 상대편의 존재 근거가 되면서 공존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의 존재형식(恒)이자 법칙(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실상은 서로 살게 하고(상생) 서로 이루게 해 준다(상성)”는 것입니다. 개념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다는 교훈입니다.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습니다.

 

도덕경 40장에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합니다.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노자의 핵심 사상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이중톈의 <사람을 말하다>를 보면 여기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상반상성(相反相成)으로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쌍방이 모두 같이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관점입니다. 바로 이런 구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둘째는 물극필반(物極必反)으로 모순적이고 대립되는 쌍방은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으로 전화한다는 가치론적 관점입니다. 위의 40장과 58장을 들 수가 있습니다.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기무정, 정복위기, 선복위요, 58장)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바른 것이 돌연 기이한 것으로 변하고, 선한 것이 돌연 악한 것으로 변한다.

 

 

상반상성과 물극필반은 도덕경뿐만 아니라 주역, 태극 음양설에도 등장하는, 동양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유무상생의 주는 교훈, 세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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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희비상생(喜悲相生)입니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 돕고 살립니다. 흔히 희비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합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서 제작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심리 영화의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영화에서 심리의 기초가 되는 5가지 요소 –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가 등장합니다.

 

리더는 기쁨이(Joy)로 매사 긍정적입니다. “잘못된 일에만 신경 쓰지 마. 늘 되돌릴 방법은 있다고!”라고 하며 “우리가 행복해야 할 이유가 정말 많다”를 외칩니다. 기쁨이 옆에 슬픔이(Sadness)가 따라다니는데 기쁨이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주인공을 기쁘게 해줘야 하는데 슬픔이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슬픔이는 “우는 건 인생의 문제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진정하도록 도와줘.”라고 말합니다.

 

평소엔 기쁨이의 긍정 에너지가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친구의 아픔을 위로하는 순간에는 기쁨이의 노력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슬픔이는 울고 있는 친구 곁에 가서 “정말 슬프겠구나” 며 한마디 하고 같이 있어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를 위로를 받고 일어서게 됩니다.

 

영화는 기쁨이의 긍정 마인드도 중요하지만 슬픔이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론 내면의 슬픔을 꺼내어 함께 공유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희비상생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출처 : 영화 '인사이드 아웃'>

 

 

둘째, 나와 적은 상생관계입니다. 아적상생(我敵相生)

 

강한 적이 있으면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서로의 성장을 돕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그가 영국의 전시 내각 수반으로 등장했을 때 그의 나이는 66세였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된 후 10년 동안 처칠은 한물간 정치인, 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처칠은 1930년대 10년 동안 켄트주에 있는 차트웰 고향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벽돌 쌓기, 글쓰기를 하면서 소일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시기가 처칠에겐 ‘광야의 시대(wilderness years)’였다고 말합니다. 처칠은 그러는 도중에도 신문 기고나 강연을 통해 히틀러의 위험을 경고하길 계속했었는데 이로 인해 ‘전쟁광’이란 비난도 받았습니다. 처칠이 다시 국가 지도자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등장이 처칠에게는 더 없는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이때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처칠의 재등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바로 선악상생의 증거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요?

 

때로는 적군이 없어지면 자신의 역할도 없어지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처칠도 2차 세계대전 승리 직후 총선에서 패배하여 정권을 잃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집권하지만 이때는 그때의 총기를 많이 상실해서 오히려 명성에 흠이 되는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중국 한나라 통일의 주역이었던 한신의 경우가 극적입니다. 항우를 몰락시키고 천하통일의 패업을 달성한 유방에게 한신은 오히려 짐이 되었고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신은 토사구팽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비즈니스에서도 악역 설정이 활용됩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인물이 애플의 스티브 잡스입니다. 애플은 초기엔 타도해야 할 악당으로 IBM을 설정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1982년에 론칭한 매킨토시 광고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후엔 마이크로소프트가 표적이 됐습니다. 일반화되고 고정화된 세계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10여 년 만에 애플로 컴백한 스티브 잡스가 진행한 캠페인이 ‘Think Different’입니다. 악당이 설정돼야 이를 무찌를 용사들이 집결하고 컬트 문화가 형성됩니다.

 

라이벌을 활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콜라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경쟁, 안호이저 부시와 밀러의 맥주 전쟁... 등등. 그들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시장 규모를 키웠고 자신들도 경쟁력을 갖고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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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영화와 드라마에선 선악상생(善惡相生)입니다

 

영화를 살리는 것은 주인공과 악역의 갈등 이야기입니다. 선한 주인공과 악한 상대역의 갈등이 치열할수록 관중은 열광합니다. 착한 인물만 등장한다면 누가 그 영화를 보겠습니까?

 

악역에 대한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인공보다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더 각광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말입니다.

 

소설가 한승원은 ‘소설 쓰는 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면 등장인물들 사이에 갈등 대립이 치열하게 일어나야 한다. 갈등 대립이 치열해야 이야기와 서술하는 문장 하나하나에 탄력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미국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좋은 이야깃감의 조건은 갈등의 충돌, 극적인 전개”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연예인의 경우 팬과 안티팬이 동시에 발생합니다. 댓글도 선플이 있는가 하면 악플도 있습니다. 선플과 악플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인기의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플에 견디려면 마음 근육을 단련해야 하는데 이런 현상을 선악상생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이겨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연예인 박수홍은 착한 이미지로 안티팬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열성팬도 드뭅니다. 한마디로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해 댓글도 거의 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박수홍 본인이 한 방송 프로에서 이런 내용을 밝힌 바 있습니다.

 

아직도 열렬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나훈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훈아의 통찰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케팅의 고수입니다. 타깃 시장을 수립하는데 귀감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30%쯤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마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
-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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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2장, ‘유무상생’ 구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개념화된 것의 상대성, 대립쌍들이 실제는 관련성을 갖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 실로 놀랍습니다. 유무상생을 발전시켜 희비상생, 아적상생, 선악상생에 적용해봤습니다.

 

 

 

도덕경 3장: 사민부쟁, 편을 가르지 말아라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是以聖人之治, 虛其心實其腹 弱其志强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실기복 약기지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칙무불치

 

특정의 사상이념이나 종교등을 숭상하지만 않는다면
백성들간에 파벌이 갈라져서 생기는 다툼은 없게 되오.

희귀한 재화를 소중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백성들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 도둑질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큰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은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자신의 마음을 깨끗히 비워서
나라의 경제를 풍족하게 채우며,
(백성들에게 부담가는)
큰일을 저지르려는 의욕을 스스로 자제하게 되면,
국가기강과 국력은 튼튼하게 다져지는 것이오.

(이렇게 성인이 무심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언제나 바라는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을 것이오.

대체로 이와 같이(백성들이 모두 순진무구하게 무심해 지면 )
소위 좀 안다는 지식인들이라 할지라도 감히 함부로 나서서
엉뚱한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무위적인 다스림을 본보기로 삼는다면,
이세상 다스리지 못할 것은 없소이다.

 

 

신용복교수님의 해석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배운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부을 숭상하고, 부자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衣養萬物而不爲主: 제34장).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爲無爲 則無不治). 나아가 천하는 무사로써 얻을 수 있으며(以無事取天下: 제57장),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제67장)고 합니다.

 

이 장의 지자(智者)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자기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한 바퀴 휘익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제60장)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철학] 노자 <도덕경>에 담긴 철학이 궁금하신가요?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 사상이며 도피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무지, 무욕 그리고 무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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