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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정주영] 현대회장 故 정주영 인생 총정리

by hlee100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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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회장 故 정주영 인생 총정리

정주영 회장 인생 총 정리

 

  고 아산 정주영 회장 (정주영)은 현대 자동차, 현대 백화점, 중공업, 보험 그리고 HDC 등 현대 그룹을 만든 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며 회장들의 회장이라는 뜻으로 왕회장이라는 벌명이 있다. 실제 현대의 비상식적인 성장이 이뤄지던 1970년대에는 현대가 모두 소화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주영 회장에게 하청을 받는 다른 기업의 회장/사장들이 많았다.

 

  할아버지 때부터 부자였던 이병철과는 다르게 집이 많이 가난해서 소학교(현 초등학교) 밖에 못나왔지만,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이며 현대라는 그룹을 만든 이야기가 한국의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함께 흐름을 같이 하기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다. 거기에다 이렇게 큰 기업까지 만들었음에도 평생동안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2006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욷르 리스트에도 포함되었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국괴의원을 지낸 적도 있다.

 

 

 

1. 어린 시절의 정주영

어린 시절 정주영 (맨 오른쪽 초등학교 동급생보다 세 살이 많아 키가 훨씬 크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현 북한)에서 태어났다. 정주영의 호인 아산은 고향 아산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15세)하는데 가난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학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 시작한다. 하지만 농사일로는 가난을 못 벗어난다고 생각해 여러차례 가출을 반복한다. 동네 면장 집에 배달된 신문을 몰래 훔쳐 보다가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생각해 무작정 가출을 감행한다. 여러번 가출을 했으며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는데, 서울에서 경리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히 아버지에게 잡혀 다시 끌려가게 된다. 아버지는 너는 장남이니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지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다시 가출을 한다. 결국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2. 서울에서의 성장

  서울에 정착해서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는데, 배달원 자리가 돈이 꽤 되어서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자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경리 공부를 해서인지 정주영은 수익을 계산하는 등의 회계일을 했는데, 이로 인해 쌀가게 주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 복흥상회 주인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터라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준다. 

 

  1935년(20세) 변중석 여사와 선을 보는데 변중석 여사는 총각이 서울에서 선을 보러 왔다는 말에 무서워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고, 결국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못보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1938년(23세) 가게를 물려받고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2년만에 중일전쟁이 터지며,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한국 미곡통제령을 내려 곡식거래가 금지되면서 가게를 닫게 된다. 하지만 가게가 망했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정도 생겼기에 일을 해야만 했다.

 

  1940년(25세)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의 소개로 자동차 정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쌀가게 단골이었던 오윤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3000원을 빌려 망한 자동차 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한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수리기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정주영은 다른 수리점보다 빨리 자동차를 수리해준다고 하여 정비소는 대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공장에 화재가 일어나 아루아침에 다 타버려 거지신세가 된다.

 

  오윤근이라는 사람은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한번에 떼인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돈이 없어진 정주영은 돈을 빌렸던 오윤근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라고 이야기한다. 오윤근도 정주영의 패기와 자신이 돈을 떼인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다시 빌려주고 정주영은 신설동에 다시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빚도 다 갚게 된다. 하지만 이제 빚도 다 갚고 돈도 좀 벌어서 잘 풀리나 싶었는데 얼마 안가 공장은 일제에 의해 강제 흡수되어 버린다.

 

 

  1946년(31세) 한국은 해방되고, 정주영은 공장이 강제 흡수되기전 모아두었던 돈으로 충무로에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다시 설립한다. 원래는 자동차 수리점으로 다시 시작했으나 미군부대 자동차를 고치는 일을 맡고 자동차 개조업으로까지 확장한다. 역시나 다른 곳보다 더 빨리 고쳐준다는 회사 신념으로 사업을 잘 확장시키고 있었다.

 

  1947년(32세)에는 아무 지식도 없는 갑자기 건설업을 시작한다. 미군부대에 수리한 자동차를 가져다주고 수고비를 받으러 갔는데, 건설업자가 돈을 받는 것을 보고 건설업이 돈을 더 많이 버는구나 해서 시작했다는 말도 있고,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 건설사를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때 만든 건설회사가 '현대 토건사'이다. 자동차 사업이 자리잡고 이번에는 좀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었는데, 6.25전쟁이 터진다. 정주영은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3. 부산에서의 호황

  피난을 간 부산에서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된다. 부산에서 미군 기숙 기설을 만드는 일을 맡게 되는데 이 일로 미군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전쟁 중 미군이 발주하는 긴급 공사를 대거 수주하게 되고, 1952년(37세)에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정주영에게 양변기와 난방공사를 맡기는데, 이는 태어나서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주영은 용산일대를 전부 뒤져 양변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물품과 정보를 찾아왔고 12일간 밤낮을 샌 끝에 공사를 끝낸다.

 

  1953년(38세)에는 UN사령부는 사절단 참배에 앞서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푸른 잔디를 깔아달라는 요청을 한다. 문제는 이 때가 한 겨울이었는데 다른 업체에 문의해봐도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부했으나, 정주영은 다른 곳이 못하는 일이니 공사비 3배를 달라고 하며, 낙동강 근처의 겨울보리를 떠다가 묘지에 심었고 결과적으로 UN군 묘지를 푸른 풀밭으로 바꿔놓게 된다. 이 2가지 일 이후에는, 당연히 더욱 신임을 얻어 미군이 발주하는 일은 모두 정주영 회장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4. 전쟁 이후 건설업

  전쟁 이후에는 이 때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도로, 교량, 항만 등 파괴된 국내 사회시설복구사업을 떠맡아 10년만에 한국 10대 기업에 들게 된다.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정주영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39세) 교령교 복구공사에서 6500만원이 넘는 큰 적자를 본다. 말이 복구공사지 신축공사와 다름 없었고, 국가 발주 공사 중 최대 규모였던 이 교각 복구는 건설환경도 열악하고 장비도 없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또한 전쟁 이후 급격한 일플레이션까지 생겨 역대 최대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자동차 수리공장까지 팔아가면서 1955년 완공시켜낸다. 이 때 정부의 신용을 얻어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며 재기에 성공한다.

 

  1961년(46세) 군사정부 수립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회사는 더욱 커진다.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1964년 시멘트 공장을 준공하여 자체적으로 시멘트를 조달한다. 1965년(50세)에는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작하여 태국의 파타니 나리타왓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1966년(51세) 전쟁 중인 베트남의 복구사업 메콩 강 준설공사에도 참여했지만 베트남의 사업은 열악한 기후와 건설여건 때문에 다시 한번 빚을 지게 된다.

 

  1967년(52세)에는 1955년(40세)에 완공시켰던 교령고 복구공사 때 팔아버렸던 자동차 사업을 다시 시작해 현대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미국 포드 자동차와 합작으로 현대 자동차의 첫번째 작품인 코티나를 판매했는데 사실 이 때는 포드 자동차 부품 조립 생산기지의 역할 정도였다.

  1970년(55세) 정주영은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공사였던 총 길이 428km의 경부고속도로를 2년만에 완성하면서 다시 믿음과 명성을 얻게 된다. 총 공사비 429억원에 공사기간 290일, 공사 중 사망인원 77명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최대희생, 최저비용, 최단기간에 만들어진 고속도로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으로 대한민국의 운송은 편리해지면서 많은 경제발전이 이뤄진다.

 

 

 

5. 다시 시작한 자동차 사업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이용할 자동차도 많아져야하니, 고속도로 완공 후에는 자동차에 올인한다. 100% 국산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1억달러를 들여 연간 5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건설한다. 당시 국내에 연간 판매되는 자동차의 수는 1천대도 되질 않았으며, 당시 기술도 갖춰지지 않은 현대가 갖고 있던 자금 규모로 연간 100% 국내생산 5만대 자동차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이번에 망하면 재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지극히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괜찮다. 까짓거 수출로 돈을 벌면 된다며 그냥 밀어붙인다.

 

 

  1976년(61세) 한국의 첫번째 독자적 자동차 브랜드 포니를 출시한다. 출시하자마자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를 장악하고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등에 수출되기 시작하여 첫해에만 1만대가 판대되었고, 70년 말부터는 연간 5만대에서 10만대로 생산을 늘리기까지 했다. 1985년(70세)에는 미국 현지에 법인을 설립하며 한국 최초로 미국 3대 방송국에 'Cars that make sense'라는 슬로건으로 TV 광고를 띄운다. 1986년(71세)에는 또 다른 신형 엑셀을 출시해 한해동안 미국에서만 26만대를 판매해 미국 수입 소형차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기까지 한다.

 

 

 

6. 조선사업으로 진출

  이제 자동차 사업이 성공하고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으나, 조선사업을 바로 시작한다. 조선사업을 위해서는 우선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했는데, 배를 지어본 경험은 고사하고 배를 만들 조선소도 없는 상태의 회사에 돈을 내어줄 은행은 국내에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투자를 받기 위해 조선소를 짓겠다고 점쳐준 미포만 백사장 해변 사진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도면을 들고 유럽으로 떠난다. 단지 배를 몇 척 팔아보자는 생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말이다.

 

  영국의 은행 바클레이즈에서 거절을 당한 후, 정주영 회장은 바클레이즈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만한 인물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이다. 이 회장에게 추천서를 받으면 바클레이즈의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전략이었다. 롱바텀 회장의 반응은 역시 시큰둥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500원 지폐를 꺼내들고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며 우리민족의 역량을 믿어달라며 롱바텀을 설득한다. 이에 롱바텀은 추천서를 써주었고, 이를 들고 은행에 가지만,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이 선박 주문서를 받아와야 차관을 주겠다는 조건을 건다. 현대는 발주는 커녕 조선소도 짓지 않았기에 사실 거절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 선박왕 라바노스에게서 26만톤의 배 2척을 주문 받는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 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준다는 파격적인 2가지 조건을 걸어 라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인다. 즉, 실패한다면 현대는 사라질만한 사업제안이었다.

 

  1972년(57세) 드디어 울산 백사장에 현대울산 조선소가 세워진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세계 최대 선주인 라바노스가 선박을 발주했기 때문이다. 작은 배도 아니고 진짜 만들어진다면 세계 최대규모의 선박이었다. 이전에도 정주영은 무모한 사업들과 도박같은 일들을 많이 벌였는데, 다들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이목이 끌린 것이 아니라, '저것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성 기사가 쏟아졌다.

 

  제일 문제는 발주기간이었다. 빠듯한 시간동안 만들어본적도 없는 배를 세계 최대규모로 만들어서 넘겨야 했다. 정주영은 조선소가 만들어지고 배를 만든다면 제 시간에 배를 만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조선소 밖에서 선박을 건조해나가자고 한다.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있는 독(dock)도 없는 상황에서 선박 건조는 시작된다. 유조선을 건조하고 바다를 준설하고 14만평의 공장을 세우는 일까지 하번에 같이 진행되는 것이다. 1974년(59세) 현대조선중공업 준공식이 열리는데 대한민국 1호선박 애틀란틱 배런도 함께 탄생한다. 2200명의 인원이 밤낮없이 매달려서 겨유 해낸 성과였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10년 뒤에 건조량 기준 세계 조선업 1위 자리를 차지한다. 1973년(58세)에는 석유파동으로 조선업과 건설업의 두 주사업이 타격을 입는다. 이 때 정주영은 석유파동의 근원지인 중동으로 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트남과 태국에서의 악몽을 떠올린 회사 중역들은 온몸을 던져가며 반대했지만, 중동에 진출해 9얼 3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다. 세계에서 잘나간다는 건설회사들이 다 입찰했지만, 현대는 저렴한 금액에 공사기간 8개월 단축이라는 약속을 내걸며 수주를 받는다. 이 때 현대가 벌어온 건설수주액은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였으며, 이후 현대의 수주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1년 126억 달러를 기록한다.

 

 

 

7. 현대그룹 은퇴 이후

  현대는 이로써 건설, 자동차, 조선 3개의 주력 사업으로 세계 시장에 뛰어들어 모두 성공신화로 만든다. 1987년(72세) 회장직에서 물러나며 경영일선에서도 물러나고 명예 회장으로 자리한다. 그러면서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92년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다. 정주영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정치적 불안이었는데, 어떤 사업가라도 정치적 변동 앞에서는 순식간에 망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정치인들에게 많이 데여서 그냥 내가 정치를 해서 사상이나 신념이 아닌 경제를 잘 하자라고 생각하여 3위로 낙선했지만 대선에도 출마한다. 낙선 후에는 정계에서도 손을 떼고 은퇴를 한다.

 

  1998년(83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부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나 남북 협력 사업을 논한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합의를 얻어 통일소라고 불린 500마리의 소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보인다.

 

  2000년(85세) 5월 건강 때문에 명예회장직도 사퇴하고, 2001년 향년 만 85세 폐렴으로 고인이 된다.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앗던 구두쇠 회장 정주영. 난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말하며 다녔으며 현대 1기 공채 출신들은 정주영을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이봐, 해보기나 했어?' 어렵지만 된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따라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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