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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투생 루베르튀르] 아이티 독립의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

by hlee100 202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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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 아이티 독립의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

 

아이티 공화국은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섬 나라입니다.

아이티 공화국'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은 가난한 나라가 됐지만, 한때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는 화물선이 가장 많이 드나들며 번성했던 지역이기도 했어요. 남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식민지로 통치한 나라이면서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운 '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곳이기도 해요. 1804년 아메리카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했으며, 노예들의 반란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 입니다. 오늘은 아이티공화국의 독립에 앞장섰던 흑인 지도자, 루베르튀르에 대해 알아보아요.

 

출처 구글 지도

 

 

1. 프랑스 지배를 받다

1492년 10월 에스파냐(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한 섬에 도착했어요. 콜럼버스는 그곳을 '작은 스페인'이라는 뜻을 지닌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고 이름 붙였지요. 에스파냐는 이 섬에 식민 도시 '산토도밍고'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어요. 

 

그러나 17세기 스페인의 국력이 쇠퇴하자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간 프랑스는 1697년 에스파냐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 지역을 넘겨 받았지요.

 

백인 정복자들은 생도밍그 섬에 들어와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설탕을 만들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팔았고 커피도 경작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생도맹그에서 나는 설탕이 자메이카·쿠바·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설탕보다 많고, 커피 생산량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지요. 당시 생도맹그에는 유럽의 어떤 항구보다 많은 선박이 드나들었을 만큼 번영을 누렸답니다.

 

초기 식민지 시절 히스파니올라에서 소수의 백인은 다수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해 농장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원주민들은 유럽의 정복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천연두 등 각종 감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어요. 원주민이 대거 사망하면서 1492년 50만명 정도이던 원주민 인구가 20여 년 후 고작 2만90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요. 농장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규모로 데려와 부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생도밍그 섬에서 유럽 사람은 3만 6천 명 정도인 반면,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 인구는 약 50만 명이었습니다.

 

 

 

2. 아이티공화국 혁명의 과정

  시간이 지나면서 히스파니올라에는 유럽인과 흑인 노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물라토'가 증가했어요. 그들은 백인 다음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보유해 중간 계층을 형성했지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일부 물라토 세력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장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어요.

 

  이 무렵 등장한 지도자가 바로 흑인 노예 출신의 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1743~1803)예요. '검은 스파르타쿠스(고대 로마의 노예 검투사)' '흑인 자코뱅(급진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온 흑인 노예였지만 특유의 총명함을 인정받아 농장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어요. 덕분에 다른 흑인 노예들에 비해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란 투생은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주인의 집사 노릇을 하며 신뢰를 얻었지요. 그리고 흑인 노예들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1791년부터 흑인 노예 해방 전쟁을 진두 지휘했어요.

프랑스가 혁명으로 혼란에 휩싸이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었어요. 투생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활용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어요. 프랑스가 흑인 노예 해방에 미온적일 때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고, 프랑스가 노예 제도 철폐를 선언하자 프랑스편으로 돌아서 에스파냐와 싸우는 식이었지요. 또 협상을 벌인 끝에 영국군을 철수시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되찾았어요. 이 과정에서 투생의 영향력은 막강해졌어요. 나중엔 혁명 정부 최고 지도자가 됐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를 공격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통일했지요. 그는 생도밍그 섬에서 평등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의 농장 주인을 되돌아오게하고, 아프리카인들이 농장에서 일하게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농장 주인들과 아프리카인이 똑같이 일하고 소득을 똑같이 나누며, 백인들이 흑인들을 매질하고 억압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투생이 식민지 자치 헌법을 만들자 프랑스의 새 통치자 나폴레옹이 2만여 명의 군사를 보내 이를 탄압했고, 투생도 결국 체포되고 말았어요. 프랑스 동부 지역의 한 성에 감금된 투생은 건강 악화로 1803년 세상을 떠났지요.

아프리카인들이 다시 노예생활을 시작해야할 즈음, 생도밍그 섬에 말라리아 (황색열병)가 무섭게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군인들이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지요. 4주만에 4천명이 죽고 나폴레옹의 처남 샤를 레클레르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때 투생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또 다시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어버리자고 결의 했습니다. 병으로 죽어나가던 프랑스군은 분기탱천한 노예들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지요. 1804년 1월 1일 생도맹그 사람들은 나라 이름을 '아이티'(높은 산의 나라라는 뜻)로 정하고 독립을 선언했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에서 가운데에 있는 흰 띠를 찢어 버렸습니다. 흰색은 프랑스왕실을 상징하는 것 이었거든요. 그래서 아이티의 국기는 빨강과 파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투생이 죽은 지 7개월 만의 일이었지요. 아메리카 대륙에선 미국(178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였고, 남아메리카에선 최초로 독립을 일궈낸 나라가 됐어요. 게다가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세운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어요.

 

투생 루베르튀르 출처 위키피디아

 

 

아이티 국기 출처 위키피디아

 

 

3. 투생 루베르튀르

루베르튀르는 1743년 생도맹그의 브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루베르튀르는 하도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그의 부모조차 아들을 병든 말라깽이라고 부르며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는 160센티미터의 단신인데다 외모도 볼품없었으나 눈이 날카롭고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성품도 좋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책을 좋아하여 주인의 서재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독서했고, 독학으로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경제에 관한 기초지식도 쌓았습니다. 그런 루베르튀르에게 은인이 나타났어요. 농장의 변호사가 그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마부로 삼았다가 이내 자유인으로 풀어줬습니다. 그동안 루베르튀르는 마차를 몰 때마다 이를 인맥 확대의 기회로 만들어 훗날 혁명 동지가 된 거의 모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이해하고 통달할 수 있었고, 생도맹그 식민지에서 일찍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 아니라 문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루베르튀르는 노예반란을 기다리던 노예해방지지자 레널 신부의 유명한 글을 읽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용감한 지도자뿐이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의 명으로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억울한 처지에 놓인 어린 양들을 책임져줄 위대한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레널 신부의 글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고 자신이 용감한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 소식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에도 전해졌고, 반란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40대 후반이던 루베르튀르는 반란군에 합류하여 혁혁한 무공을 올리며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강대국 스페인, 영국, 프랑스와 차례로 전쟁을 벌이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1801년 루베르튀르는 자신이 노예로 있던 섬 전체를 다스리는 총독에 올라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였습니다. 새로운 헌법은 노예제도를 폐지했고, 모든 직업을 모든 인종에게 개방했으며, 생도맹그가 사실상 독립국으로 활동하도록 보장했습니다. 불과 10년만에 루베르튀르와 그의 군대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죠.

 

 

 

4. 시사점

노예제는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언제나 인류와 함께했습니다. 심지어 1600년대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였습니다. 그런 노예제가 어떻게 종식될 수 있었을까요? 노예제라는 악습의 고리를 끊은 것은 인류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고, 그 중의 최고봉은 아이티혁명이었습니다. 유구한 인류역사에서 독립국가를 탄생시킨 성공한 노예혁명은 아이티혁명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한 남자가 노예문화의 새 판을 짰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요?

투생 루베르튀르는 아이티의 옛 이름인 생도맹그에서 오합지졸 노예병사들을 막강한 군대로 변모시켜 당시 유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스페인, 영국, 프랑스를 차례로 무찔렀습니다.

 

그는 반란의 한복판에서 그는 두 가지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첫째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하는 지휘관의 능력, 둘째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비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영감을 주는 능력을 보여주었죠. 이렇게 하여 그는 노예문화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문화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루베르튀르는 결혼, 정직, 충성의 3대 사회적 가치를 노예병사의 문화 DNA에 깊이 각인시켜 그들이 엘리트 정예병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아이티혁명을 성공시키고 종국에는 위대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개인의 근면성, 사회의 도덕성, 공공교육, 종교적 관용, 자유무역, 시민의 긍지, 인종간 평등에 토대를 두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꿈꾸던 삶의 방식을 영원히 정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노예문화에서 자유문화로 전환하는데 유익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미국 땅에도 닿아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에게 영감을 주어 노예봉기에 이어 남부의 분리와 남북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종국에는 노예해방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위대한 성공 뒤에는 위대한 문화가 있다”

 

문화는 리더의 개성과 믿음과 전략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화의 출발점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그런 덕목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요, 진정한 리더가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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