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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국제사회학/2. 미국 (United States)

America Express (아멕스) 관련 내용 총정리

by hlee100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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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 Express (아멕스)

America Express (아멕스) 관련 내용 총정리

 

1. 신용카드 시스템이란

신용카드 시스템은 물건을 사는 결제를 구매자의 거래은행과 판매자가 간의 지불처리를 관리해주는 결재 네트워크 브랜드이다. 국제적으로 결제 네트워크가 제휴되어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편하게 신용카드로 결제할 있다.

 

 

2. 신용카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유래

150 미국의 역마차 택배를 배달하던 회사였다. 1803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입했고,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지역을 사들였다. 그렇게 영토를 넓혀가면서 짐이나 우편물을 운반할 일의 수요가 많아지게 된다. 세계 최초로 ‘Express’라는 상표를 사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인물이 있었으니, 자가 윌리엄 핸든이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얻어 핸든스 패키지 익스프레스라는 간판을 걸고 철도위주의 운반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의 장기적 성공을 봤을 운송비용을 낮추기 위해, 많은 계약금을 주고 철도회사와 독점적 장기계약을 맺는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성공적으로 사업을 확장시켜나간다.

 

이후, 철도 뿐만 아니라 수운을 통한 운반업까지 확장하려는 어느날, ‘헨리 웰스라는 선박 운송업을 하는 사업가를 만나 함께 일하게 된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둘의 의견차이로 갈라지게 된다. 핸리 웰스는 사업망을 올버니에서 버팔로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윌리엄 핸든은 현재 사업장인 보스턴, 뉴옥, 볼티모어에 더욱 집중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결국 1841 핸리 웰스는 혼자서라도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독자적으로 크로우포트 리빙스턴 조지 페미로이 투자를 받아 리빙스턴 & 컴퍼니 설립하게 된다. 올버니에서 버팔로 사이 운송업을 위해 역마차를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때는 자동차도 발명되기 전이었고, 도시간의 철도도 없었으며, 배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배달원을 자처하며 사업을 시작한다.

 

사업이 시작된지 2년만인, 1843 도시 사이의 철도가 개통된다. 이의 회사는 급성장하게 되고, 당시 운송회사의 화물 대리점을 운영하던 윌리엄 조지파고라는 청년을 만난다.   청년은 훗날 헨리 웰스와 함께 미국 4 은행 하나인 웰스파고 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그의 열정을 높이 평가한 웰스는 파고를 배달원으로 스카웃했고, 1년만에 파고는 버팔로 대리점의 운영을 혼자서 정도로 성장한다.

 

1845 핸든시 패키지 익스프레스의 사장이었던, 윌리엄 핸든이 별세함에 따라, 핸든이 회사를 인수하고 올버니 뉴욕간의 운송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1848 회사 초기 투자자인 크로우포트 리빙스턴이 별세하고, 웰스는 뉴욕 서부 급행편의 사업을 리빙스턴의 동생과 파고에게 매각하면서 리빙스턴&컴퍼니는 웰스&컴퍼니와 리빙스턴 파고&컴퍼니로 분리된다.

 

1848, 미국 서부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전세계적으로 미국 서부 골드러쉬가 일어났고, 미서부 개척시대가 일어났다. 이에 맞춰 운송업의 수요는 더욱 증가했고, 웰스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린다. 역마차 마부였던 워렌 버터필드 뉴욕 중서부의 역마차 사업을 장악해나가고 있었고, 1849 버터필드 왓슨&컴퍼니를 설립하면서 급행편 사업에 뛰어든다. 웰스 입장에서는 라이벌이 나타난 상황이라 가격인하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으니, 버터필드도 가격인하로 맞대응하면서 서로 손해를 보는 구도가 되기에 이르른다. 결국 웰스와 버터필드는 합병하기로 한다. 소식을 들은 리빙스턴 파고&컴퍼니도 합병요청을 하면서 3 회사는 각각 5 달러씩 출자하여 합병하기로 하고 1850 3 18, ‘미국 전역에 급행편 망을 형성하겠다 의미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창립된다.

 

 

 

3.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창립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지불 약속 지키겠다는 신조를 가지고 골드러쉬의 전성기와 맞물려 나날이 사업이 확장해나간다. 그러던 1855 9,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가지 임무를 맡게 됩니다. 아이오와 정부로부터 두개의 상자에 포장된 정부자금 5 달러를 뉴욕에 있는 미국 재무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상자를 재무부까지 전달하여 뚜껑을 열어보니 돈이 아니라 납이 들어있었고, 사건의 범인을 잡아내긴 했지만, 5 달러를 회수하진 못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정부에게 5 달러에 이자까지 덧붙여 전액을 지불했고, 사건으로 그들의 신조인 지불 약속 증명하게 되면서 신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된다.

 

 

 

4.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여론 대응 확장 방법

당시 미국의 급행편 사업은 미국 동부 연안과 남부에서 사업을 하던 애덤스 익스페르스를 제외하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독무대였다. 이마저도 애덤스 익스프레스와 서로영역을 나누어 과거의 무리한 가격 경쟁으로 피해 입었던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독점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과 여론이 생겨났다. 그래서 마치 독점이 아닌 같이 보이는 방법을 찾은 것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경쟁사처럼 보이도록 다른 회사를 만들어 지역을 분할하여 운영했다. 일반인 눈에는 독점적으로 보이지 않고, 동시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경영을 지배할 있는 자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1855 내셔널 익스프레스, 미국 익스프레스의 자회사를 만들게 된다. 그러던 1861 미국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위험수당을 받으며 병사들의 편지나 훈장 등을 가족에게 운송해주면서 확장하게 된다.

 

 

 

5.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금융업계 진출 역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1,500명의 사원과 890개의 사무실 대리점을 운영하며 미국 전역에서 급행편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 전체 우체국 수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우체국은 급행편 사업 폐지안을 은행에 제출하면서까지 아멕스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우체국의 운송은 너무 느렸기에 기각된다. 결국 우체국은 우편환어음 시스템을 만들어 의회에 취급 승인을 받게 된다.

우편환어음 시스템은 송금자가 가까운 우체국에 가서 보내고자 하는 현금의 금액이 쓰여진 머니 오더를 구매, 작성하면 현금 대신 머니오더가 우편으로 배달되고, 이를 받은 수신인은 해당 우체국으로 가서 다시 현금으로 교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직접 현금을 보내는 것보다 안전했다.

1864 우체국에서 시작된 우편환어음 사업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안전한 이쪽에 사람들이 몰렸지만 다른 대안을 강구하지 못했다. 1882년이 되어서야 마르셀러스 베리라는 직원이 우체국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기획한 위조가 불가능한 가위로 오려 금액을 표시하는 형식의 머니오더 사업을 시작한다. 1890년대 말에는 머니 오더 연간 매출이 350 달러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머니 오더의 시스템 생각지 못한 이익이 발생한다. 송금자가 머니오더를 구입해서 발송하면, 며칠 수신인이 받아서 해당 금액으로 환전하는데, 사이의 시간동안 금액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머물러 있는 유보자산이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사업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수중에 있는 유보자산도 엄청나게 커졌고, 유보자산을 활용한 투자를 통해 막대산 수익을 거두게 된다. 우체국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었지만 어느새 금융업과 금행편 사업 모두를 진행하게 것이다.

 

 

 

 

5.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금융업 전세계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머니 오더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그리고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수익을 유럽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런 흐름을 파악한 아멕스는 해외에서도 현금화 있는 방법을 모색했는데,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 50 곳의 은행과 계약을 맺고 아멕스의 머니 오더를 현금화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해외 은행에는 상당액의 현금을 예탁하여 현금화 시버스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했고,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거래 은행이 늘어나며 아멕스는 미국을 넘어 국제적인 금융 서비스 기업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 1891 당시 아멕스의 사장은 윌리엄 파고의 동생, 제임스 콩델 파고였다. 그는 불편한 것을 아주 질색했는데, 유럽에 1달간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여행 비용 전액을 현금으로 가지고 다닐 없어 미국 대은행의 신용장 1장을 가지고 갔다. 신용장이란, 예금자가 거래 은행에 청구하여 발행받는 증서로 해외은행에서 현금을 찾아쓸 있었다. 하지만 매번 현금 인출 본인 확인을 위해 예금자 거래 은행에 보관 중인 서명을 해외 거래 은행에 우편으로 보내야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유동적인 환율을 해외은행이 마음대로 정했기에 환율사기를 당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느려서 한달 여행 이후 돌아온 제임스 파고는 머니 오더를 기획했던 베리를 불러 미국 여행자가 해외에서 현금을 쉽게 찾을 있는 좋은 방법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베리는 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최초의 여행자 수표를 개발한다. 수표는 여행자가 왼쪽 상단에 미리 자신의 사인을 쓰고, 나중에 해외은행에서 찾을 아래에 자신의 서명을 하는 방법으로 본인확인절차를 장소에서 있게 했다. 또한 수표에 수표 만들 당시 환율을 미리 기재해놓아 환율 변동 없이 환전될 있도록 했다. 또한 10달러, 20달러, 50달러, 100달러 종류별 수표를 만들어서 필요할때마다 있게 했다. 1891 3,  세계 최초의 여행자수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드래블러스 체크 탄생하고 사용자 편의에 맞춘 취지 덕분에 체크는 푸른 지폐라고 불리며 여행자의 필수품이 된다.

 

Travler's Check

 

 

 

6.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관광업 진출시도와 신뢰도

아멕스 유럽사업을 담당했던 데리버는 트래블러스 체크 확산 방안을 고민하다가 프랑스 파리 아멕스 사무실에서 관광 안내, 호텔 예약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상담 서비스를 시작한다. 그러자 영어가 통하지 않는 파리에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도움을 얻고자 사무실을 찾았고, 당연히 트래블러스 체크 판매량도 급격히 증가했다. 관광업 분야에서 희망을 보고, 1902년부터 유럽 대리점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표를 팔고, 철도표 판매에 이어 관공투어 사업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아멕스 사장이던 제임스 파고는 데리버의 여행사업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고집 제임스 파고에서 아멕스는 미국의 전통있는 금행편 회사였기 떄문이다. 그러던 1917 미국은 1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전시에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미 철도로를 국유화하고 모든 급행편 회사를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아멕스는 여기에 반대했지만, 전시상황에서는 어쩔 없었다. 결국 1918 7 아멕스는 급행편 사업을 종료하고 회사의 전통이 사라지는 위기를 맞는다. 또한 1920 무렵 아멕스는 무역업도 하고 있었는데, 중국 시장으로 활로를 열기 위해, 중국 물건을 들여와 미국에 팔기로 했다. 그리 마작패와 5만개의 유리구슬, 화병 중국 물품을 대거 사들였으나, 전세계 경제불황이 터지게 된다. 엄청난 양의 중국 물건들은 창고에서 방치될 밖에 없었다. 결국 1921 아멕스 회사의 외국무역본부를 폐지한다.

1923 프레드릭 스몰이 사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주춤했던 관광업을 추진한다. 트래블러스 체크나 머니 오더 등의 금융업만으로도 어느정도 회사가 유지되는 수준이었으나, 1929 10 24 세계대공황이 시작된다. , 스몰은 아멕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트래블러스 체크와 머니오더의 현금화 서비스를 계속하겠다고 선포한다. 심지어 1933 3 미국이 최악의 경제상황을 겪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휴업 조치를 내려 전국 은행이 영업이 중지된 상황에서도 아멕스는 몰려드는 고객들에게 끝까지 현금인출을 허용한다. 이후 2 세계대전 중에서도 계속해서 서비스가 유지되면서, 아멕스의 신뢰도는 크게 상승한다.

 

 

 

7.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2차 전성기

 

2 세계대전이 끝난 ,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황폐화된 유럽을 재건축하기 위해 기술적,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유럽 부흥 계획, 일명 마셜 플랜(Marshall Plan) 발표한다. 그리고 아멕스는 이것을 활용한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돈을 쓰면 자체가 경제원조이기 때문에 유럽 여행은 마셜 플랜의 일환이다라며 광고한 것이다. 때마침 대형화된 비행기도 대중화되면서 유럽을 여행하는 인구는 급증한다. 이는 결국 트래블러스 체크의 전성기를 불러온다.

 

 

 

8.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업 진출

 

1950 뉴욕의 사업가였던 프랭크 맥나마라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현금이 없어 곤혹을 치룬 경험을 바탕으로 요금을 나중에 지불하는 신용카드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리고 변호사이자 친구였던 랄프 슈나이더와 함께 다이너스 클럽 카드라 부르는 최초의 신용카드를 개발하게 된다. 신용카드는 다이너스 클럽과 계약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 카드를 보여주면 결제는 월말에 한꺼번에 있었기 때문에 편리한 결제 시스템이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신용카드는 미국인들의 필수품이 된다. 이에 맞춰 여러분야의 회사들이 신용카드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아멕스도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때마침 먼저 카드업계에 진출했던 전미 호텔협회 회장으로부터 15만명의 회원과 가맹호텔 5,000 등을 모두 양도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이런 행운까지 따르며 아멕스의 신용카드 사업은 빠르게 준비된다. 당시 다이너스 클럽 신용카드 회비는 5달러였는데, 아멕스는 우리가 격이 높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회비를 6달러로 측정했다. 그렇게 1958 10 1, 아멕스는 회원들에게 신용카드를 발송하게 된다. 동안 쌓아왔던 신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입회신청을 했고 1959 5월에는 종이 대신 플래스틱으로 카드 재질을 변경하고 카드번호, 이름, 주소 등을 엠보싱 처리하여 내구성을 향상시킨다. 이후 1961 3, 최초 컴퓨터 IBM 7070-1401 도입하면서 과거 수작업으로 진행하던 일들을 자동화로 전환했다. 1969 아멕스는 자주색에서 녹색으로 디자인이 바뀐다. 이는 미국 지폐의 색상이 녹색임을 모방한 것으로 신용카드 = 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후 1971, IBM 발명한 마그네틱 스트라이프 기술을 신용카드에 도입하여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였다. 이후에도 아멕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기술을 최대한 빠르게 적용하여 고객들이 편리하게 신용카드를 사용할 있도록 노력했고, 현재까지 신용카드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America Express (아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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