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사람 안철수 과거, 결혼, 정치경력 등 일생 정리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62년 2월 26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서 아버지 안영모와 어머니 박귀남 슬하 2남 1녀 중 첫째로 출생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신경정신과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병원 건물에 있는 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초 심는 것을 좋아해서 건물 옥상에다가 갖가지 종류의 꽃을 심어, 옥상은 이미 어린 안철수만의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를 곧 죽을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닭까지 키워내기도 하는 등, 뭔가를 키우는 것에 굉장히 능했다고 한다. 동식물을 키우는 것 외에도 기계를 분해하여 재조립하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한번은 친척집 괘종시계를 망가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잘 아는 친척들은, 그가 집에 오는 날이면 중요한 기계는 모조리 숨겼다고 한다.
의외로 중학생 시절까지는 그다지 우등생이 아니었다고 한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성적이었으나 대신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빌렸고 빌린 책은 몇 권이든 하루 만에 다 읽어서 바로 다음날 반납했는데, 사서교사가 이를 보고 '얘가 일부러 장난치는 거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했다고. 어릴 때 꾸준히 독서를 한 결과인지, 부산고등학교 재학 때부터는 성적이 일취월장해왔다고 한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결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시절인 1988년, 가톨릭 학생회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만났던 1년 후배 김미경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딸 하나를 두었다. 부인은 병리과 전문의로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3. 군복무
3-1. 대한민국 해군 군의관
3사관학교 부대마크와 사관후보생 번호표를 군복에 부착하고 있는 걸로 봐서, 육군3사관학교 의무사관 후보생 기초군사교육 과정 중 찍은 사진이다. 특수사관후보생들은 기초군사훈련은 육군에서 받고 임관 전 최종적으로 임관할 군종이 정해진다. 현재는 육군학생군사학교로 양성과정 교육기관이 바뀌었다.
1991년 2월에 해군 군의중위로 임관, 1994년 4월까지 복무했다. 장기복무를 지원해 합격하고 원에 의한 전역을 하여 최종 계급은 대위다. 해군 의무병과 인원들의 특성상 해병부대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해병대와도 인연이 있다.
3-2. 육방부식 억지비난과 반론
해군 군의관 시절, 주말마다 근무지인 진해에서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왕래한 것을 두고 위수지역 이탈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군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위수지역 개념이 없는 해군은 규정상으로는 문제 없었다. 오죽하면 해군 관계자마저도 열불날 일이란 걸 애써 참으며 '이것은 문제없다'고 답변했을 정도이다.
해군 영외자의 비상소집시 복귀 기준점은 육군과 달리 지역이 아니라 시간제이다. 예컨대, 제2함대 함정 근무자의 경우 30분 내 부대 복귀 가능한 거리에 대기해야 하며, 진해 육상 근무자는 부대 복귀 시간이 길다. 참수리급 고속정은 아예 5분대기라 반쯤 영내생활이나 다름없다. 참수리 BOQ도 부대 내에 있다. 해공군 영외거주자는 이론상 개인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든 초능력으로 워프를 하든 비상 소집시 정해진 복귀 시간만 지킬 수 있으면 일과 시간 외에 국내 어디를 가든 문제없다. 또한 휴가자의 경우 별도의 휴가자 복귀령이 동반되지 않으면 휴가종료일까지 비상소집에서 열외되며, 복귀령이 나와도 시간을 길게 준다.
4. 의사, 백신개발자
본래 직업은 의사로 임상의학 대신 기초의학 연구를 택하여 생리학교실에서 대학원생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는 류마티스내과의 교수가 목표였었으나 기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여전하여 컴퓨터를 장만했는데 그 당시 컴퓨터의 가격은 대학원생인 안철수가 감당해내기에는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그는 정말 돌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부품만 갖춘 컴퓨터를 겨우겨우 구매했고 이후 컴퓨터에 빠졌다고 한다.
1988년 어느날 본인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이는 안철수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거의 밤새 바이러스 걸린 컴퓨터와 씨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독학으로 백신개발에 몰두하였는데 결국 의사를 그만두고 나중에는 안랩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에서 컴퓨터를 고치는 의사가 된 셈이다.
세계 최초의 백신은 1987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V3이 88년 6월에 처음 배포된 것을 생각하면 안철수의 백신 배포 시기도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한다. 군의관 전역 이후 의과대학 교수직을 내놓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 연구에만 전념하다가 1995년 3월 '안철수컴퓨터 바이러스 연구소'를 창업한다. 이 회사가 오늘날의 안랩이다.
IT 회사를 창업까지 한 이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키보드를 보고 타이핑을 한다는 말이 있다.
5. 경영인
1995년 3월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창업했다. 하지만 초반에는 직원도 4명뿐이었고 사무실 구할 돈이 없어 자신의 집에서 직원들이 일을 했다고 한다. 직원들 줄 월급이 모자라 부모님에게 돈을 빌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4년을 어렵게 보냈는데,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안철수의 모범 경영과 맥아피의 인수 제의를 거절한 내용이 보도되며 안철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9년에 터진 CIH 바이러스, Y2K 문제를 잘 극복하면서 IT 기업 1위 자리에 오르며 한국판 빌 게이츠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안철수연구소로 사명을 변경하고 2005년까지 대표 이사를 역임했으며,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국민대표 8인 중 경제인 대표로 참석하였다.
경영자로서 모범적인 경영을 하였다.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로서 재직중인 당시에 절대 차입경영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모범적인 벤처기업 경영의 사례로 손꼽는 이들이 많다. 또한 안철수연구소에서 채용을 할 때 학력, 외모, 성별 등을 따지지 않는다. 이게 당연한 듯 보여도, 아직도 많은 기업들은 학력을 대졸 이상으로 못박는다. 관련 내용 물론 위에서 부채가 적으므로 좋은 회사라 표현했으나 부채가 있는 회사라고 하여 부실한 회사를 뜻하지 않는다. 부채가 없는 회사는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붕괴로 자멸한다는 것과, 부채가 없으면 공격적인 전략을 취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현대 회계에서는 일정량의 부채가 있는 것을 중요시하기도 한다. 단,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이렇다 할 수익모델이 없이 필요성만 보고 백신을 개발하던 회사라, 누군가 투자하지 않는 한 애초에 돈을 빌려올 능력이 안되는 회사였을 수도 있다.
연구소를 나오면서 초창기부터 일했던 직원 100명에게 무상으로 주식 1.5%를 나누어주었다(안철수의 주식 1.5% 무상분배에 대하여)고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는지 안철수는 현재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37.1%를 보유 중이다. 이는 3,35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리고 2011년 어느 기사에는 연구소에서 일하지도 않는데 주식이 있다고 부르주아 인텔리 좌파라고 까는 무개념 댓글이 베플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직원들과 간담회에서 한 직원이 "회사에 노조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자 "회사 접어야죠"라고 대답해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일화가 정치계 입문 후 인터넷에 소개돼 노동관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기사 이에 대해 새정련 대변인을 지냈던 금태섭 변호사는 "(저서인) <안철수의 생각>부터 여러 차례 노동 문제를 다뤘고 대선 캠프에서 노동 분야도 따로 있었다.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과거 회식 자리 비슷한 발언에 대해 당장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이상한 전언을 가지고 이렇게 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박하였다.
5-1. 안철수 재직 중 V3
대표적 안티 바이러스 브랜드는 V3이 있다. 컴퓨터용 안티바이러스 제작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PC 통신 초기이던 1980년대 말에 출현한 브레인 바이러스를 수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이것을 프로그램화하여 최초의 한국산 안티 바이러스인 'Vaccine'을 만들게 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을 VT에 뿌렸을 땐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차차 버전을 올려가면서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퇴치기능을 추가할 때 Vaccine 3, 줄여서 V3로 명칭이 굳어졌고, 이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V3부터는 버전 넘버를 따로 매겼는데, 그 버전 넘버가 곧 V3가 잡을 수 있는 멀웨어의 개수였다. V3 Ver. 100이라면 100개의 바이러스를 잡아낼 수 있었단 얘기. V3의 영향은 한국의 많은 이들이 컴퓨터용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가리켜 '컴퓨터용 바이러스 백신'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서 경쟁할 프로그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백신을 사업화하지 않고 있다가 윈도우 시대로 넘어와서 백신을 유료화하자, 뭇 초딩들에게 "바이러스를 고치는 백신을 돈 받고 팔다니, 아저씬 나빠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언론들 역시 백신의 사업화를 부정적으로 보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 까대도 실질적으로는 무료 버전인 V3+Neo를 계속 버전업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문제는 v3+neo는 실시간 감지 기능이 없었으며 이미 당시의 백신의 대세는 무료백신으로 DB를 확보하고 부가기능이 추가된 유료백신을 사업자 & 코어사용자용으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이후의 V3는 무료백신(과 데이터 수집, 이미지 관리) 부분에서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고, 그 여파를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5-2. 안철수 퇴직 후 V3
안철수가 공부를 이유로 회사를 떠난 후, 안철수연구소는 무수한 논란을 터뜨렸다. 안철수가 떠난 뒤의 안랩은 '무료 백신은 세계의 대세가 아니다' 등의 헛소리를 했고, 무료 V3 역시 V3+Neo 같은 도스 버전만 지원하다가 국내에서도 어베스트 등의 한글화 무료백신이 나오면서 밀리고 밀린 끝에 출시했다. 물론 유료로 전환한 것 자체는 필요한 조치였으나, 당시 안랩 대표가 '무료 백신은 세계의 대세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한 시점의 보안업계 뉴비들의 사업모델은 개인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안티바이러스 / 방화벽을 뿌리고 개인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DB를 확충한 다음, 법인 시장을 노리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한 것은 당시의 안랩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초창기 V3는 시대를 앞선 무료백신이었는데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V3의 성능 부족을 '한국 토착화' 같은 소리로 무마하려고 하며 개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는 V3는 카스퍼스키가 잡아내는 거 절반 밖에 못 잡는다는 등의 온갖 흉흉한 평들이 돌아다녔으며, 이 때 생긴 V3의 나쁜 이미지를 극복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윈도우용 무료 백신 V3 Lite를 배포하며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5년 즈음부터는 해외의 벤치마크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6. 교육인
만 28세였던 1990년 3월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20대에 최연소 교수, 그것도 학과장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좀 속사정이 있는데, 안철수 본인이 임상의학보다 기초연구 쪽에 관심을 두고 인턴, 레지던트 과정 대신 기초의학인 생리학을 전공하였는데 신설 의대 증가로 전국적으로 의대 교수 자리, 특히 기초의학 교수가 매우 부족하게 되면서 이례적으로 빠르게 교수를 달았던 것이다. 당시 안철수는 군 미필에 박사학위 미소지 상태라 28세에 교수가 된 것이 가능했고, 그 정도로 기초의학 교수가 부족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학과장을 맡게 된 것은 다른 교수들에 비해 젊다는 이유로 귀찮은 일이 많은 학과장을 떠맡게 된 사정도 있다. 임용 1년 후인 199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단국대를 휴직하고 군 복무에 들어갔다. 군 전역 후에 복직하여 잠시 교수생활을 이어갔으나 1년 뒤 그만두고 회사를 설립했다.
회를 설립한 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EMTM을 취득했다. 중간관리직~임원 정도에 있는 사람들이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학교를 나가서 2년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다. 간혹 이를 컴퓨터과학 석사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혀 관계 없다. 제조업이나 IT산업 쪽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에 대한 석사학위다.
이것도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2005년에는 회사 대표를 사임하고 나이 마흔이 넘어 또 다시 유학길에 올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비즈니스스쿨에서 EMBA를 취득했다.
2008년 귀국하여 카이스트 경영과학과 석좌교수에 임용됐다.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주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안철수의 보직 이름은 정문술 석좌교수이다. 처음 1년간은 주로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다 그 다음해 부터는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여담이지만 학부생을 가르칠 때의 수업인 <기업가적인 사고방식>은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수업 자료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케이스들을 사용했는데, 원본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배부할 자료들도 복사를 하지 않고 각 부에 해당하는 저작권료를 모두 자비로 냈다.
2011년 서울대학교의 러브콜을 받고 이적,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맡고 있었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하며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교육자로서의 길을 요약하자면 의대 교수 생활을 접고 창업해 잘 나가던 벤처기업 CEO였지만 또 다시 접고 유학생활을 거쳐 경영학과 교수를 지냈다.
7. 서울시장 선거 출마
7-1. 서울시장 선거 출마 관련
안철수는 여야 정치권에서 정계 입문 제의를 많이 받아왔다. 젊은층의 지지로 인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특별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의한 적도 있고, 참여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 제의를 받은 적도 있으며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 출마 제의 등등 종류별로 다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안철수는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권력)을 즐기지 못하기에 거절했다.”며 “실무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앞으로 정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이처럼 안철수는 일관되게 정치 입문을 부인해왔으나 2011년 8월 이후로 윤여준이 “안철수가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출마 가능성이 있다.”고 정치적 발언을 언론에 알리면서 화젯거리가 됐다. 이전에 정치 입문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해왔던 안철수의 입장도 애매하게 바뀐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으며 9월 실시된 ‘청춘콘서트’에는 수십 여명의 기자가 몰려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안철수의 출마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를 긴장시켰고 젊은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비정치인 인물로서 정당들이 그동안 안철수 영입에 노력해왔음에도 매번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철수는 ‘무엇인가 도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을 세 가지 들었다.
1. 내가 정말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인지
2.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인지
3. 실제로 내가 일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일인지
이 중에서 안철수는 “의미를 느꼈는데 (2)와 (3)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출마를) 거부했다”며 “그런데 최근 들어서 세 번째 의문이 풀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을 조율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일각에서 제기된 행정경험 부족에 대해 “그동안 대학원장과 대기업 CEO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행정운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충분히 할 수 있을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정서상 한나라당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안철수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 “내가 생각할 때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이다. 한나라당은 응징을 당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한다”라며 “그럼 답은 명료하다. 나는 현 집권세력이 한국사회에서 그 어떤 정치적 확장성을 가지는 것에 반대한다. 내가 만일 어떤 길을 선택한다면 그 길의 가장 중요한 좌표는 이것(한나라당이 정치적 확장성을 가지는 것에 반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인) 1970년대를 경험했다. (현 집권세력이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거 거꾸로 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출마 고민에 대해 안철수는 “행정이기 때문에 고민을 시작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장 이렇게 여러 일 때문에 (서울시장) 자리가 열려있는데 이걸 또 이상한 사람이 망치면 분통 터지는 일이다. 그게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정말로 자격 없는,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서다”라고 말했다. 안철수의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면서 민주당은 안철수 영입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시민운동을 한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중인 가운데 안철수는 박원순과도 대화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확답한 적이 없으며 여론조사 등을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행정 운영을 통해 서울시를 바꾸려면 최소한 10년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윤여준 멘토설’에 대해 안철수는 “개인적으로 따로 윤여준을 만난 일은 없었다. 솔직히 석 달 전 윤여준을 처음 뵙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라며 “그 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한 300명 정도 되고, 또 저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김제동씨나 김여진씨도 제게 멘토라 할 수 있다.”라며 부인했다. 그는 “정치인인 국회의원은 혼자서 바꿀 수 없는게 많지만 대통령이나 서울시장같은 행정가는 자신 혼자서 바꿀 수 있는게 많기 때문에 의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국민일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5%를 넘어 2위인 나경원(13~17%)을 두 배 이상 제쳤다. 자신의 지지율이 높은 것에 대해서 “지금 사람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비교가 안 된다. 건국 이래 역사상 가장 심하다. 아직 만으로 40대인 나 같은 사람이 아직 (출마를) 할지 말지도 결정 안했는데, 저렇게 역사가 오래된 당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면 그게 민심이다. 나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철수는 서울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하드웨어에 치우친 행정을 문제로 꼽았는데 구체적인 개선사항에 대한 정치적 의견도 덧붙였다.
“ (지금 서울시는)완전히 하드웨어에만 매몰돼서 남에게 보이는 사업만 (진행)돼왔다.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 실제로 사는 사람의 불편함, 위기 관리는 도외시 되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예를 들면, 도로 표지들이 무원칙하다. 직진하다가 갑자기 좌회전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통일이 안 되어 있다. 교통 막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도 없다. 주차난도 굉장히 심각하다. 그런 걸 해결할 방법 중 하나가 노상 주차장 등에 요즘 같으면 센서를 설치할 수 있다. 이것을 공공 데이터로 만들면 서울시에서는 그것을 이용해서 스마트폰 앱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어디에 자리가 비는지 (시민에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에너지 문제, 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부가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 선진국은 다 공개한다. 그러면 데이터를 시민들이 가공해서 좋은 정보를 만들어 창업한다. 국가 보완과 상관 없는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알리면 일자리가 생긴다. 저 사람들(정치인들)은 그런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다. 평생 자기만의 전문 분야를 갖지 않으면 그런 아이디어를 갖기 쉽지 않다. ”
기존 정치세력들의 분열조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했는데 “대북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교육문제에 대해서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 진보인가 보수인가? 그것은 나눌 수가 없다. 그것을 나누고 분열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라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했다.
7-2.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
안철수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여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2011년 9월 4일에 주요 언론사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모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지만 안철수는 자신과 오래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다음날 9월 5일 출마를 양보할 수도 있다고 했고 그 다음날인 9월 6일 오후 4시에 박원순과 만나 불과 17분 동안의 대화 끝에 박원순으로 단일화했음을 발표했다. 일단은 ‘누가 출마하느냐’, ‘단일화가 되느냐’ 등이 모두 선거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안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존중하는 동료이신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서 그 분의 포부와 의지를 충분히 들었다.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서 서울시장을 누구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다. 저에 대한 기대도 우리 사회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우리 미래 세대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지금까지 심정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해해준 박경철 원장님께도 감사하다. 단일화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 출마 안 하겠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란다.”
박원순은 단일화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시장직 자리를 원한 게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결론이 나온 것”라고 말했다. 박원순은 또 안철수에 대해 “아무리 신뢰관계가 있다해도 저보다 10배나 더 되는 지지도를 갖고 있던 분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내 말) 한마디로 양보한다는 게 사실 또 믿기 어려운 그런 일”이라며 “안 교수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어떤 공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해왔던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였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후 박원순, 한명숙, 문재인 등은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범시민 야권 단일후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박원순-한명숙 두 사람은 범시민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해 상호 협력하고, 이후엔 선거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안철수의 불출마 선언에 대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안 원장은)50%대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5%대의 지지율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했다. 그것은 조중동과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핍박하고 무시하던 시민사회의 상징과 가치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었다.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커밍아웃이다”라고 극찬했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조국 교수는 “우월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교수 양보. 큰 박수를 보낸다. 이 분의 ‘쓰임’은 또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정치판이 바뀔 조짐이다. 통큰 단결로 서울시장 선거, 총선,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안철수, 과연 ‘인물’이군요. 이 정도 열풍이면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이 멀쩡해도 취할 텐데, 50%의 지지율에도 흔쾌히 양보. 이번에 박 변호사 도와주시고, 그보다 더 큰 물에서 뜻을 펼치세요”라고 말했다.
안철수의 아버지 안영모는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사람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안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렸다”고 말했고 대선출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말릴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들 나이도 50이 넘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말려서 되겠나. 이제부터는 일절 말 안 하고 지켜만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안철수와 박원순은 단일화했으나, 이전까지 박원순의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은 5%에 불과해 ‘안철수의 지지층을 박원순이 흡수하는지’, ‘민주당에 입당하는지’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단일화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원순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힘입어 지지율이 대폭 상승하여 나경원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집전화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에서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답변이 많았으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을 수 있는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박원순이 51.6%를 얻어 32.5%의 나경원을 압도했다. 그 후 박원순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최종 당선되었다.
7-3.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
안철수에 대한 여론의 관심에 대해 언론들은 ‘안철수 신드롬’, ‘열풍’ 등의 표현으로 보도했다. 안철수가 서울시장 후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인 이후 언론은 차기 대선 여론조사 대상에 안철수를 포함시켰다. 안철수는 박근혜와의 1:1 가상대결에서 43.2%를 기록해 40.6%를 기록한 박근혜를 이겼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박근혜가 차기 대선 지지율 2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나와 차이가 더 벌어졌다. 특히 야권 후보들 중에는 지지율 31%를 기록해 2위를 차지한 문재인(16%)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안철수는 20~30대 젊은층, 대학생, 화이트칼라, 호남지역에서 6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서울지역에서도 54%의 지지율을 보여 박근혜를 넘어섰다. 하지만 안철수는 2012년 대선 출마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2011년 9월 7일 안철수는 출근길에서 차기 대선 출마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가당치도 않죠. 사실. 생각해볼 여유도 없고...”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 강남지역 총선 출마설이 돌자 2011년 12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제3당 창당이나 강남 출마설 등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은데 분명한 것은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말했고 대선 출마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안철수가 이미 정치적 야심을 품고 2011년 11월부터 대선을 겨냥한 ‘과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북한문제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지지자인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가 안철수를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 야당 중진의원 등 전문가들이 경제, 국제관계 등 각 분야에서 안철수를 돕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김근식 교수는 언론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안철수에 대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제 시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안철수와 전문가들의 만남을 주도한 것은 김효석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다. 안철수의 지인인 김종인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은 “지난 10월부터 민주통합당 중진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안 원장이 공부모임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8. 정치 참여와 제18대 대선
민주통합당 문성근 최고위원은 2012년 1월 25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 “대선 후보로 뛸 생각이 있다면 민주통합당 경선에 나와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12년 4월 16일 중앙일보는 안철수가 제19대 총선 이전 대선 출마 결심을 굳혔다는 보도를 냈으나 안철수의 측근은 이를 부인했다.
같은 해 7월 19일 안철수는 정치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 국가 중대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아는 범위내에서 서술하였으며 정치권에서는 비록 책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발간으로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책 출간 하루 전 7월 18일 SBS의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 녹화 작업을 했으며 7월 23일 방송되었다.
같은 해 9월 19일 안철수는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각종 여론조사시 유력한 대권주자였으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과정에 여러 가지 마찰이 있었으며 2012년 11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12월 6일 안철수는 문재인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발표,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부산, 군포, 대전, 광화문에서 문재인 후보와 4번의 공동유세를 하였고 대구, 강원, 전북 등 전국 40여 곳에서 지원유세를 하였다. 문재인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에게 패배하였다.
9. 국회의원 당선
2013년 4월 24일 실시된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60.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된 안철수는 무소속 국회의원의 국회 상임위원회 배정 권한이 있는 국회의장과 상의 없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배정을 희망하였고, 여야 원내대표 이한구와 박기춘은 합의하여 안철수의 보건복지위원회 배정을 결정하였다. 이에 국회의장 강창희는 여야 원내대표인 이한구와 박기춘을 불러 국회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 질책하였고, 보건복지위원회는 안철수의 보건복지위원회 배정 희망 신청서를 거부하였다. 이후 5월 23일 강창희는 직접 안철수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배정하였으며,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 등을 고려해 안철수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배정하였다고 국회 대변인 배성례는 언론에 밝혔다.
9-1.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취임
한편 안철수는 2013년 11월 28일 국민과 함께하는 새정치 추진위원회(새정추)의 출범을 알렸다. 추진위는 향후 건설될 예정이었던 안철수 신당의 모체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듬해 1월 21일에는 3월 안으로 정식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2월에는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당창당작업에 나섰다가 3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격적으로 제3지대 신당창당을 선언하여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고 1기 공동대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2014년 7월 재보선에서 참패했으며, 이후 대표직을 사퇴했다.
9-2.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문재인 대표가 조선대 강연에서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즉, 문.안.박 체제로 지도부 구성을 하자 하였으나, 안철수 의원이 거부하였다. 안철수 의원은 다시 역제안으로 혁신전대를 제안했으나, 문재인 대표는 거부하였다. 안철수 의원은 12월 6일 경 국회 정론관에서 문재인 대표에게 혁신전대 거부를 재고 하라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날렸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는 이를 다시 거절하였다. 6일 최후통첩 성격의 기자회견 후 칩거중이었다가 12일경 다시 노원구 자택에 돌아왔다. 12일 자정 즈음, 문재인 대표가 노원구 자택에 안철수의 탈당을 막으려 찾아왔지만, 밖에서 악수만 한 채 불발 되었다.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던 13일 오전, 국회 정론관으로 가는 도중 차에서 문재인 대표와 협상 하려 문재인 대표와 통화를 했지만 결국 협상에 실패하였다. 이날 오전 10시 경 안철수 의원은 국회 정론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나며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며 탈당을 선언하였다.
9-3. 국민의당 창당과 총선 약진
2015년 12월 13일경 새정치민주연합 (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안철수, 김한길, 천정배 등이 중심이 되어 2016년 2월 2일에 창당하였다. 영문이름은 "The People's Party"다. 2016년 1월 1일부터 1월 6일까지 국민들을 상대로 당명을 공모하였으며, 당명 이름을 "국민의당"으로 확정하였다. 이후 1월 1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윤여준, 한상진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창당준비위원회를 정식 발족하였다. 1월 11일 선거관리위원회에 국민의당 당명을 등록하였다. 그리고 2월 2일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안철수, 천정배 의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하고 공식 출범하였다. (안철수 - 상임공동대표, 천정배 - 공동대표)
2016년 3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통합"을 하자는 식의 발언을 하자, 김한길, 천정배 등은 통합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안철수는 야권통합은 없다면서 통합 제의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합은 무산되었다.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선거 전 여론조사와 달리 38석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고, 16년 만에 여소야대, 20년 만에 3당 체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호남에서의 큰 성과와 달리 나머지 지역에서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한계이다. 이후 4·13 총선 당시 같은 당 박선숙, 김수민 의원이 연루된 선거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였다.
10. 제19대 대선 후보
2017년 3월 20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펙트 스퀘어에서 "공정·자유·책임·평화·미래의 가치를 수호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제19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손학규, 박주선과 겨루어 국민의당 제19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선 후보 선출 직후 지지율이 급상승하여 각종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한 자리수 차이를 보이면서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이후 단설유치원 발언 논란, TV토론에서의 부진 등으로 인해 계속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결국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21.4%를 득표하여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이은 3위로 낙선하였다.
11. 바른정당과의 통합 추진
2017년 10월 안철수는 당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바른정당과의 합당 논의를 본격화하였다. 이후 당대표 재신임을 묻기 위해 전당원투표를 실시하였고, 74.6%의 찬성으로 통합 추진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 반발한 박지원, 유성엽 의원 등 당내 일부 호남 의원들은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2018년 2월 11일 치러진 전당원투표에서 73.6%의 찬성으로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가결됨에 따라 바른미래당이 창당되었고, 안철수는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12. 서울시장 낙선
2018년 4월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민선 7기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온종일 초등학교 도입, 서울시 뉴타운 준공영개발 추진, 서울 전철 57 km 구간 전면 지화화 등 다양한 공약을 내걸었으나,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에 이어 이번에도 3위로 낙선하게 되었다. 이번 패배로 큰 타격을 입어 정계에 입문한 지 5년 9개월 만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3. 국민의당 창당과 코로나
2020년 2월 안철수를 주축으로 하는 국민의당을 창당했으며 초대 대표가 되었다. 21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1년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할 것을 발표했다. 이후 금태섭과의 제3지대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했다. 3월 23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2020년 3월 1일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유행 중인 대구광역시의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을 찾아가 선별진료소에서 의심 환자를 진료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학교 교수도 같이 참가하였다. 안철수는 당분간 자원봉사 형식으로 대구광역시에서 의료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안철수의 개인 정치 일정은 모두 취소하였다.
안철수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 의사 면허를 제대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맞냐, 의사 면허 갱신은 제대로 했느냐 하면서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대한의사협회에서 안철수, 김미경 부부는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매년 30평점 이상 이수하는 모범 의사라며, 의사 면허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는 규정에 따라 아내와 2주간 자가격리를 실시했고 바이러스 검사 역시 음성으로 나왔다.
4월 27일 아내와 다시 무기한 의료봉사를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7월 9일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벌어질 2021년 재보궐선거에 서울시장 야권 주자로 유력하게 꼽히고 있다. 안 대표 입장에서도 지난 지선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었고 서울시장이라는 자리가 대한민국 선출직 No.2인만큼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대신에 이번 보궐선거를 선택할 수도 있다. 7월 23일, 내년 4월 열리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나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 생각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다만 친안계 최측근인 권은희 의원이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 진지하게 생각 중“이라고 밝히며 여전히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출범 이후 주호영 원내대표의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탈당 이후 국민의당에 합류한 바 있는데, 당시 안철수가 보여준 정치적 역량을 보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2020년 9월 24일 한 포럼에선 "국민의힘이 국민의당과 통합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별로 큰 효과가 없을 것" 이라고 선을 그었다.
14. 제 20대 대통령 선거
2021년 11월 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천명했다. 2021년 12월 중순까지는 지지율이 높지 않았으나 12월 말부터 지지율이 점점 상승하고 있는 추세이다.[19] 이로 인해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제18대 대통령 선거, 2021년 재보궐선거의 전례로 보아 주요 후보와 또 단일화를 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섞인 말도 나왔으나 일단은 단일화 없이 대선을 완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5. 사람 안철수에 대해서
15-1. 철학
안철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이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존댓말을 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못하는 안철수는 심지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도 병사들에게 반말을 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간호사와 안철수연구소 직원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사회적인 지위가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과 가족에게도 존댓말을 쓴다는 점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안철수는 부부싸움을 하느냐는 질문에 “존댓말로 한다”며 “어린 시절 자신에게 늘 존댓말을 쓰시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안철수에게 매번 존댓말로 대해주었으며 혼낼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동안 어머니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늦잠을 자서 택시타고 등교할 때 어머니가 “학교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처음에는 사촌이나 친누나로 착각하고 “누나가 참 착하네요” 라고 하였으나 후에 어머니라고 밝히면서 “어떻게 어머니가 존댓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의 존댓말이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은 모범적인 사생활을 한다고 말한바 있는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시절엔 술을 자주 마셨으나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에 과음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이후부터 술을 끊어 전혀 마시지 않고 있으며 흡연도 하지 않는다(참고로 안철수는 과음과 과로로 입원한 상태에서도 회사를 경영하다가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이나 남들 앞에서 화를 내본 적도 한 번도 없으며 욕을 해본 적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청교도적인 삶을 산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은 뭔가를 참아본 적도 없고 오히려 마음 편한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며, 명예보다 자기 마음 편한게 중요하며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매순간 재미있고 의미있는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했는데 “의사로서 계속 생활을 했다면 훨씬 단순하고 집중할 수 있는 생활을 했겠지만 의사를 그만둠으로 인해서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효율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안철수는 자신이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효율성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맞는 분야를 찾기 위해서 쓰는 시간은 값진 시간”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기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안철수는 자신이 크게 성공한 것에 대해 시기가 잘 맞았다고 말한다. 바이러스는 기계어를 알아야 분석할 수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기계어를 배운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어 이런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이라는 것은 기회가 준비와 만난 순간이다”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재능과 노력, 운이 모두 맞아떨어진 것이며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며 사회적 성공이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15-2. 경영
안철수는 CEO는 제일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역할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수평적인 관계에 있으며 CEO는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는게 기본 철학이다. 그는 회사를 경영할 때 영혼을 불어넣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회사지만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가치관이 있으면 자신이 없거나 구성원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과거에는 바이러스가 장난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최근의 바이러스는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 유포를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낸 후 중국 등에서 한국인들의 개인정보를 암거래 하는데 사용되며 러시아의 마피아가 동원되는 등 조직범죄로 발전했다. 안철수는 “백신 회사는 범죄율(바이러스)이 높을수록 이익이 높아지는 아이러니한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명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돈벌이 수단으로 백신 사업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사회에 해악이 된다”고 강조했는데 경찰과 군인 등도 마찬가지에 해당된다. 이를 위해 상류층의 사람들의 노력이 중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일례로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도 사건의 핵심 인물 상위층으로 올라가면 명문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출신들이 많으며 이들이 문제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사회에 똑똑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워튼 스쿨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MBA에서 법학 강의를 들을 때 담당 교수는 “A학점을 줄 수밖에 없는 똑똑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10년 후에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감옥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며 똑똑하지만 개인적인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자신과 빌 게이츠를 비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했는데 “분야도 다르고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도 다르며, 회사 규모 차이도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1년 11월 14일 안철수는 자신의 안철수연구소 주식 37.1%의 절반을 저소득 가정의 자녀 교육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12월 9일 기준으로 그가 기부할 주식의 가치는 약 2500억 원이다. 2012년 2월 5일 안철수가 재산을 기부해 설립할 공익 재단 이사장에 박영숙이 선출됐고 2012년 2월 22일 공익 재단의 이름은 공모 결과 안철수 재단으로 선정됐으나 2013년 3월 7일 동그라미재단으로 명칭이 바뀌고 김영 이사장이 선임됐다.
15-3. 교육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만 하고 자신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범을 보이지 않고 강요만 한다면 아이들은 책 읽는 흉내만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독서습관을 키워주기 위해선 부모의 솔선수범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5-4. 벤처와 중소기업
안철수는 “대한민국의 벤처기업 95%는 망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혹자는 “요즘 세대들은 너무 안전지향적이다.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안철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카이스트에서 학생을 가르쳐온 안철수는 학생 개개인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학생들은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있고 호기심이 왕성하다”며 “다만 그런 도전정신이 강한 학생들을 사회가 더 큰 힘으로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몰아붙이는 사회 구조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는데 안철수는 “실패의 요람”이라고 바꿔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실리콘밸리에서는 100개의 기업이 나타나면 99개는 망하고 1개만 생존한다. 실패한 기업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없고 최선을 다했다면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이다. 99번 실패를 하더라도 1번 성공하여 1,000배의 성공을 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실패를 전부 갚고도 남게 된다는 것이다.
”
그는 이것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패한 사람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는게 청년들의 도전 정신을 살리는 길이며 벤처와 청소년을 살리는 길이라고 이 같은 말을 했다.
15-5. 평가
- 1500억원 가량의 재산을 기부했다.[119] '2015년도 국회의원 재산변동 및 등록사항'에 따르면, 안철수 의원의 남은 재산은 787억4931만 원이다. 2012년 9월 19일 뉴욕 타임스는 대선출마를 선언한 안철수에 대하여 ‘한국의 정치 스타’로 표현했다.
- 프랑스 AFP 통신은 그를 “부패와 정치, 기업 권력에서 때 묻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일본의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은 “지금까지의 정치인과 다른 신선한 인물”로 평가했다.
- 4월 20일, 소설가 이문열은 김유신을 다룬 소설 《대왕, 떠나시다》 발표를 계기로 진행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대선의 주요 변수로 떠오른 ‘안철수 현상’에 대해 ‘언론의 아바타 만들기’라고 평가절하했다.
- 9월 20일, 한때 안철수의 멘토로 불리던 김종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안철수에 대해 “경제 민주화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부족한 사람”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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