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치산은 현재 누구인가?
왕치산(王岐山, 병음: Wáng Qíshān, 1948년 7월 1일 ~ 현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경제학자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11대 부주석이다.
2. 왕치산의 젊은 시절 요약
왕치산은 중화민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산서성이라고 한다. 왕치산은 문화대혁명 당시 대부분 고등학생이 그렇듯이 고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삽질을 했다.
23세 되던 해, 1971년 산시성 (산서성)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1976년에 중국 서부의 시베이 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2년 후 당시 유배중이었던 경제관료 야오이린(姚依林, 1917-94)의 딸 야오밍산을 만나 1978년(30세) 결혼했다. 1979년까지 산시성 (산서성) 박물관 관리직을 맡았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 중국 근대사 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된 연구 분야는 청말과 민국초였다고 한다.
1983년 경제 건설과 국가 개혁에 참여하기 위해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야오이린이 유배에서 풀려 정부에 복귀했는데, 이때 왕치산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채용되면서 공무원 생활을 한다. 이때 능력을 보여 주목을 받아 고속출세를 하게 된다.
1988년까지 중국 농촌신탁공사 총경리, 중국 국무원 농촌연구실에서 농촌 개혁과 발전 정책을 연구하다가, 1988년부터 금융계통에서 요직을 맡아서 성과를 냈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광둥성의 금융담당으로 아시아 각국의 금융위기가 중국에 옮겨붙지 못하게 하는 성과를 내서 광둥성 부성장으로 승진했다.
1996년까지 중국인민은행 부총재를 역임하였으며, 1997년에는 중국건설은행 총재 등 주요 금융 기관장(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나 당 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비슷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정일치제이니 감사원장의 위상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을 역임하였다. 1997년 12월, 광둥성 당위원회 상무위원을 거쳐 다음 해 1월부터 부성장을 지냈다.
2000년대부터 주룽지 총리의 주목을 받아서 중국국무원 경제 체제 개혁 판공실 주임으로 일하게 되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는 하이난성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베이징 시장을 맡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의 초석을 놓았다.
2003년에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은폐 문제로 인책 사임된 멍쉐눙의 후임으로 베이징시 대리 시장이 되었다. 그 후 SARS 문제 처리에 대한 탁월한 공적을 인정 받아 2004년 2월, 베이징시 시장에 정식 취임했다. 2007년까지 베이징시 시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임명되며 중국공산당 중심부에 진입하였으며, 18차 당대회에서 제 18기 상무위원이자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012년까지 중국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또한 칭화대학교 대학원 경제관리학원 교수를 지냈으며 칭화대학교 경제관리학원 이사회 이사, 이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2007년 10월의 제17기 1중 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8년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상무, 금융, 무역, 시장 관리, 관광 등을 담당하는 중국 국무원 부총리, 중국 국무원 당조 구성원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 개혁파 출신의 정치가로 중국 국무원 총리에 취임할 것으로 국내외 기대를 받았으나, 2012년에 제18차 전국대표대회와 18기 1중 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제18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왕치산은 2018년 3월 전인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왕치산은 지난 1980년대 초부터 중국 공산당의 국가적 시장주의 개혁파의 주요 공직자 중 하나였던 야오이린의 사위이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전략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칭화 대학에서 경제학 분야 교수직을 맡아 동 대학 경제•경영•금융학 분야의 재건에 비중있게 참여한 바도 있어 중공 내에서 사실상 칭화계 인물 중 하나로 분류된다.
3. 왕치산의 업적
현재 중국공산당 내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으로 서열 8위이다. 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외견상으로는 시진핑 다음의 2인자처럼 보일수 있지만,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에는 포함되지 않아서 직함에 비해서는 권력의 힘이 약하다.
전인대에서도 왕치산의 직함이 유임되면서 시진핑의 사실상의 1인 독재가 확립되도록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번 전인대는 시진핑이 2012년부터 보유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중국 국가주석, 그리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3대 최고권력직을 다시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석직의 임기를 폐지하여 사실상 마오쩌둥 시절의 1인 지도체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2년 5월초 윤석열 당선인의 20대 대통령 취임식의 중국대표 사절로써 방한하였다. 중국이 부주석급 고위인사를 보냈다는 것은 중국이 진심으로 한중관계를 더 좋게하고 싶은 의도라는 분석이 있다. 이렇게 방한한 왕치산은 중국과 한국의 우호를 강조하며 유화제스쳐를 내놓으면서 시진핑이 윤 대통령과의 회담을 원한다며 중국에 먼저 초청하며 방중권유를 하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측은 사의를 표해 거절하면서 역으로 시진핑의 방한을 권장하는 대응을 하였다.
중국의 초청에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일단 윤석열 정부가 중국에 얼마나 친화적인가에 대한 중국의 테스트이기도 하다. 만약 수락을 한다면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윤 정부를 제2세계인 중국측에 어떻게 포섭해야 하는지로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외교관례상 지난번 문재인 정부가 2번이나 중국에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한 만큼 이번에는 중국측에서 방한으로 와야하는 차례인데 한국보고 또 오라고 하는 행동으로 보수성향 언론에서는 속국 새 왕 됐으니 와서 인사해라?라며 방중초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윤 당선인은 왕치산 부주석과 만날 때 고개를 제대로 숙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시진핑 앞에서도 숙이지 말아야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사람이 고작 서열 8위 수준의 부주석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는건 문제가 될만한 외교적 처사다.
덩샤오핑의 집권기인 1980년대 이래 중국은 '7상8하', 즉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에서 67세까지는 현역이지만 68세부터 물러나는 것을 관례로 하여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도록 해왔다. 이에 따르면 당초 왕치산 정도의 나이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어야 했겠지만, 시진핑의 지지로 인해 오히려 부주석으로 승진까지 했다. 이 점에서 그의 부주석직 임명은 7상8하 원칙이 사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 전 정취안홀딩스 회장이 "판빙빙에 대한 탈세 조사는 판빙빙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은 왕치산 부주석이 입막음용으로 취한 조치"였으며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내가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대만의 자유시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권력핵심부에 건재한 왕치산에게 성상납을 했는데도 판빙빙이 이렇게 갑작스레 거액의 벌금을 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더 설득력이 없다는 말도 나오기도 한다. 자유시보가 그 동영상을 보았다고 주장한 궈원구이는 미국에 망명한 중국인 망명객 재벌인데 이에 대해서 뉴욕타임즈에서는 그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투의 기사를 작성하였다. 중국은 궈원구이를 인터폴 적색수배 명단에 올려놓고 부동산 사기 등의 혐의로 10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나루히토 일본 천황 즉위식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때까지 한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여한 중국 인사들 중 가장 최고위급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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