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아베 신조의 출생, 청년기, 결혼, 정치경력, 일대기 정리
1. 아베 신조는 누구인가?
아베 신조(일본어: 安倍 晋三, あべ しんぞう, 1954년 9월 21일 ~ 2022년 7월 8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90·96·97·9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25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대학 졸업 후 고베 제강소의 직원으로 일했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의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제3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지냈으며, 제72대 내각관방장관,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낸 바 있다.
2006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2012년 12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5년 3개월 만에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취임했다. 이후 2017년 10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9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으며, 2018년 9월 20일에 있었던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3선 연임에 성공해 2020년 8월까지 총리직을 맡으며 일본 역사상 최장 임기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팔아 넘기려고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으며 2019년 11월 벚꽃을 보는 모임에 관한 스캔들, 2020년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실패로 인하여 국민들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같은 해 8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궤양성 대장염과 관련한 건강 문제로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9월 16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후임 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계에 몸을 담았으며, 2021년에 자유민주당 내 파벌 조직인 세이와 정책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2022년 7월 8일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 괴한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직접 만든 산탄총) 을 받아 병원에 이송되었고 17시 3분경 사망했다.
2. 아베 신조의 생애
(1). 출생과 성장
1954년 9월 21일,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였던 아베 신타로와 그 아내 아베 요코(安倍 洋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오쓰군 유야정(현재의 나가토시)이다. 친조부는 중의원 의원이었던 아베 간, 외조부는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이며, 외종조부(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는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이다. 이렇듯 세습 정치 가문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훗날 아베는 "어려서부터 나와 가까운 곳에 정치가 있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야구 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TV를 즐겨보며 형사가 되기를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2). 학창 시절
기시 노부스케가 입학하도록 주장한[7] 세이케이 계열에서 소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를 비롯해 아베 간,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가정교사였던 히라사와 가쓰에이, 친척들까지 도쿄 대학 출신이 많았지만 아베 신조는 입시를 통과한 것이 아닌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세이케이 대학으로 진학했다.
(3). 회사원 시절
졸업 이후 얼마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우다가 1979년 4월 귀국한 뒤 고베 제강소에 입사하여 뉴욕 사무소, 가코가와 제철소, 도쿄 본사에서 근무했다. 이 중 가코가와 제철소에서의 경험에 대해 아베는 "나의 사회인으로서의 출발점", "나의 출발점"이었다고 회고했다.
(4). 정치 입문
최초의 전후 세대 출신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일본 총리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또한,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레이와 시대의 첫 총리이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처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제1차 아베 내각). 그러나 지나치게 빨랐던[10][11] 정치적 성공 탓인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하며 권위가 실추된 데다 건강상의 문제가 겹쳐, 단 1년 만에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단명 총리로 남았다.
하지만 이후 자민당 출신의 후임 총리들[13]도 1년 이하의 임기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민주당 총리들[14] 역시 단명 내각을 이끌며 3년 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 총리직에 복귀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제2차 아베 내각). 2년 뒤인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5년 뒤인 2019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압도적 다수 의석을 그대로 유지하여 정권을 연장했다(제3, 4차 아베 내각).
아베는 2차 총리 임기를 8년 가까이 지내며 큰 존재감을 남겼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임기 종료 이후 약 7년간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일본의 내각제를 자신의 탄탄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안정시켰다.[15][16] 경제적 측면에서는 단단한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의 경제를 상당 수준 활성화하는 데 성공했다.
외교적 측면에서 아베는 미국에게, 중국, 러시아, 북한 등 반서방 세력 견제를 위한 매우 중요한 조력자로 인식되었다. 아베노믹스나 아베독트린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베 신조의 그릇된 역사관을 이유로 들어 대일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과거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계속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불렀다. 참고로 아베는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신냉전 구도의 당사자인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다. G7 서방국가들의 ‘요구’와 일본 내 우익 세력의 '요구'에 응하여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경기가 나아져 매년 늘어난 GDP와 세수액 및 예산을 비교해 본다면 비록 매년 증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1%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은 오히려 한국(GDP 대비 2.6%)이나 중국(GDP 대비 2.0%)과 비교하였을 때 양호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2020년 8월, 1차 사임 때와 같은 이유인 지병 문제로 8년만에 총리직을 사임하였으나, 여전히 당내 최대 파벌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영수이자 당내 실세로서 힘을 발휘했고 후임 총리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를 총리로 만드는 데에도 깊이 관여했다.
2021년 제49회 총선 이후 기존 파벌 회장 호소다 히로유키를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회장에 취임하여 정계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2022년 7월 8일, 참의원 선거 유세 중 피살당했다. 재집권에 성공하여 2차 내각을 구성한 2012년 12월에서 9년 7개월 만이었다. 이로써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중 7번째로 피살당한 인물이 되었다.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 이후 92년 만에 민간인에 의해 총기로 암살당한 전/현직 총리이기도 하다.
3. 아베 신조의 사망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32분 경,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위해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역에서 참의원 의원 사토 게이 후보의 지원 유세 연설을 하고 있던 도중, 전직 해상자위대 자위관 출신으로 알려진 41세 남성 야마가미 데쓰야에 의해 피격당해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피격 5시간 30여 분 만인 오후 5시 3분,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수술을 담당한 나라현립의과대학 부속병원 의료진은 아베 신조가 병원에 후송되었을 당시 이미 심폐정지 상태였으며, "목에 약 5㎝ 떨어져 2곳의 총상이 있었고 상흔은 심장에까지 이르렀다"고 밝혔다. 부인 아베 아키에 여사가 오후 4시 57분 경 병원에 도착했지만, 불과 6분 만인 오후 5시 3분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아베의 시신은 병원 내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다음날인 7월 9일 아침 6시경에 영구차에 실려 도쿄 시부야 자택으로 운구되었다. 장례는 사흘 뒤인 7월 12일에 도쿄 내 사찰인 '조조지'에서 가족장으로 열렸다.
장례 방식은 가족장으로 진행하며, 구체적인 장례 논의는 7월 10일 참의원 선거 개표 이후에 이뤄질 예정이다. 본래는 국장으로 진행한다는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경우 선거 일정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이후 일본 정부는 최고등급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을 동시에 추증했다.
4. 아베신조의 정치경력
(1). 경제 정책
1). 아베노믹스
무제한적 양적완화와 정부지출, 구조개혁이라는 소위 3개의 화살을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아베의 취임과 동시에 G7 국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시하기 시작해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비관론도 만만치 않게 거세다.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의 목표는 기업들의 낙수효과와 소비심리 회복이다. 구조개혁이란 '1억총활약사회'라는 기치아래 여성과 노인의 노동을 장려하고, 기간산업 민영화와 고용시장의 유연화를 촉진시키고, 기업규제를 개혁해서 일본을 더 활기차게 만들고, 이민 완화를 통해 1990년대부터 일본의 골칫거리인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2). 아베 신조 총리 재임 기간 동안의 닛케이 지수
일본 닛케이 지수는 아베 신조가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하루에 3~4%가 넘는 급상승세를 펼쳐 5년 4개월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2015년 이후로는 거의 18000선 부근에서 안정을 찾았고, 2016 후반기부터 2017년 중반기에는 19000대 후반에서 20000사이를 오르내리는 중으로 경기가 많이 호전되었으며 엔/달러 환율 역시 111엔대로 상당히 안정적이다. 2021년 2월 14일, 버블 붕괴 이후 30년 만에 30000선을 돌파했다.
사족으로 통화 정책은 그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던 1980년대에도 국가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정책으로서는 연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 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세금 감면과 기술 개발의 정부 보조 등을 약속하는 와중에 이러한 조세 정책만으로는 자본이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을 받자(Timing Problem), 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 통화 정책이 부상한 것이다.
또한 경제와 친서방 행보를 동시에 잡는 정책의 일환으로 당초 일본은 미국이 권유하는 TPP(다자간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가 여부를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이 민주당인 데다가 농가의 타격을 우려한 만큼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반대가 많아 소극적이었으나 아베는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TPP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3년 4월 TPP 참가국들의 참가 협상 승인을 받았고 # 미국은 자국 의회에 정식으로 일본의 TPP 협상 참여를 통보하였다. 이것으로 한국의 FTA 행보(특히 한미 FTA)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TPP가 성사되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0.66%(3조 2,000억엔)이 증가할 것이고, TPP 참여국 가운데 미일만으로 90%의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만큼 환태평양 경제권의 리더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보수적인 예측으로 피터 페트리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TPPA 참여는 일본 경제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라며 GDP를 10조 엔(약 98조 원) 정도 늘리는 효과가 있으리라 추산했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의 예측치 3조 2천억 엔의 3배를 넘는 수치다. 또한 일본의 갈라파고스화가 된 시장과 규제를 TPP 참여로 단숨에 글로벌 규격에 맞추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TPP에서 미국을 빼낸 도널드 트럼프 당선 전까지의 장밋빛 청사진이었다. 트럼프는 다자무역협정은 물론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협상한 모든 대외협정에 대해 부정적인데, TPP는 여기에 모두 해당되었으니 불가피한 결과였다. 아베는 트럼프의 당선소식을 듣자마자 뉴욕 트럼프타워로 황금 골프채를 들고 달려가는 정성을 보이면서까지 TPP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했다. 어쨌건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고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시장개방까지 해가면서 TPP-11로 밀어붙였지만 참여국 중 일본이 가장 큰 시장이 되어버렸다. 즉, 일본은 미국과의 FTA 효과도 못누리고 졸지에 다른 10개국으로부터는 무역적자만 볼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버린 것. 혹여 미국이 향후 다시 TPP에 복귀한다하더라도 위와 같은 희망섞인 전망을 재현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특히 아베노믹스가 좋게 끝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존재한다. 왜냐면 이런 식의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는 언젠가는 장기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특히 현재의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국채 금리 상승에 취약한 상황이다. 이미 국채 자체가 GDP의 2배를 훌쩍 넘어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출구전략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영영 마이너스 금리를 못 빠져나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비록 아베 임기 동안 소비세를 인상하는 법안이 민주당 정권 시절의 여당 의원들에 의해 통과되긴 했지만, 아베 내각 들어서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도 논란이 많은데,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이 하는 것과 정 반대의 디플레이션, 소비침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베 2차 내각에서도 소비세를 8%로 증세를 하면서 아베노믹스의 효과를 상쇄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두 차례 추가 인상일정을 연기하고 말았다. 2013년, 2%의 성장률을 이뤄내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던 아베 노믹스는 8%로 소비세 인상을 강행하면서 상당히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2013년 당시만해도 일본이 곧 3% 성장도 가능하다는 꿈 같은 관측도 나왔었지만 소비세 인상 이후 성장률이 다시 하회하면서 말그대로 꿈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소비세를 인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의 높은 재정지출과 함께 국가 신용에 대한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국채 금리가 상승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심각한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반응은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대부분인데, 일본이 빚갚는답시고 소비세를 1990년대부터 당시 3%에서 현재 8%로 5%포인트 올렸으나 부채는 GDP대비 50%대에서 200%로 증가해 무려 4배가 됐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가 경기부양을 위한 적극적인 승부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양적완화가 핵심정책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새로운 기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본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아베 2기 내각의 정책의 성공여부가 일본의 명운을 가를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일단 2019년 연말에 현행 소비세 8%에서 10%로 증세하기로 거듭 확정한 상황이다. 또한 2019년 4월부터 외국인 노동자 수용을 시작했다.
(2). 외교 정책
1). 강한 친미 성향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강한 친미 성향과 반중, 반북 정책. 이는 일본 자민당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우파인 자민당은 친미 성향이며, 좌파인 야당들은 일반적으로 친중, 친한 노선을 띠고 있기 때문. 따라서 아베와 자민당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왔다.
2). 한일관계
아베 내각 시절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양국의 현대관계사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이승만 정부 시대 전반 및 박정희 정부 시절 양국관계가 나빴던 시점 등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으나, 민주화 이후 행정부 가운데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행되던 1990년대 중반,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찾았던 2012년 등과 함께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악화의 요인은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나 1회성 이벤트 등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제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일본 정계의 극우화, 미국 행정부의 동아시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양국 최고 지도자의 상대국에 대한 지속적인 부정적 인식 등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였다. 특히 일본 측 수상관저에서 직접 결단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에 대한 경제조치가 양국관계의 결정적 악화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과거에는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패권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효과적인 시행을 위해 한미일 공조가 상당히 중요함에도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원칙을 계승하기보다는, 자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들 간의 갈등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방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3). 군사 정책 - 대규모 군비 증강 및 평화헌법 무력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전후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지해왔던 노선을 폐기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반 서방 세계 국가들에 대한 억지력과 공격력을 키우는 대규모 군비 증강 정책이 아베 내각 기간 내내 이루어지고 있다. 당연히 동아시아의 과거 일본제국에 의한 전쟁 피해국이었던 한국, 북한, 중국 등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G7을 포함한 서방 국가의 지지를 확보한 일본은 이러한 저항을 가볍게 쌩까고 해군력과 공군력을 급속도로 키우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국방 예산은 아베의 취임 시기인 2012년 4조 7억 엔에서, 2019년 5조 3천억 엔으로 증가했으며, 2018년엔 다른 국가들의 해병대에 해당되는 수륙기동단을 창설했다. 거기다 사실상의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이즈모급 함선을 2척 건조했고 F-35를 100대 이상, 구축함급인 30FFM도 20여 척 이상 추가 주문해놓은 상태다.
또한 평화헌법에서 집단적 자위권 부분을 개정하는데 성공했으며 순수 공격용 무기인 JASSM 및 JSM 공대지 순항미사일 도입에 사실상 지대지 탄도미사일에 해당되는 도서 방위용 고속 활공탄까지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래에는 자체적으로 초음속 대지 순항미사일까지 개발하여 배치할 계획으로 이미 예산 증편을 완료했으니 평화헌법이 사실상 무력화시킨게 아니냐는 여론이 많다.
(4). 내부 정책 - 외국인 노동자 수용 정책
아베 정권 하에서 일본 내의 외국인 노동자는 2018년 기준 138만명으로, 그가 집권하기 이전에 비해 2배가 되었다. 2018년 10월, 2025년까지 5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법안을 승인했으며,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2019년 4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제 일본은 저임금 단순노동직도 5년간 노동자 자격으로 일할 수 있으며, 기술직 노동자의 경우 가족 동반이 가능하고 사실상 무제한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데다 영주권도 취득 가능하다. 또한 일본어 능력시험 요건도 대폭 완화한다. 아베는 이것이 '이민정책'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일본의 문화를 외국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한다"고 하며 다문화 이민정책을 추진함을 시인하였다.
물론 자민당 주요 지지층인 보수계에서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있으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반의 일본국민들이 이민개방을 용납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중에서도 일본제일당만이 극렬 반대할 뿐, 나머지 일본 유신회 등 우익성향 정당들은 모두 찬성이며, 입헌민주당 등 리버럴 계열 야당은 내국인의 임금감소 등 다소 우려는 있으나, 만약 유럽식 이민제도를 확립하고 외국인에게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할 변화라는 입장이다.
이로써 아베는 일본에 첫 대규모 외국인 이민을 결단한 총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 인구의 28%가 노인이고 젊은이들은 힘든 직종은 기피하고 있어 농어촌이나 지방 중소기업들은 이미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이 잇따르고, 저출산 노령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이민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국내외의 회의론자들은 아베가 한 일은 체류자격을 세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기능실습생이라는 이름 하에 오랫동안 들어온 사실상의 노동자들을 이제서야 노동자라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의 거류외국인 비율도 예전부터 참 말이 많은데, 의도적으로 불법체류자 숫자를 축소해서 발표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다. 다만 이것도 한국의 일본취업자 입장에서는 위기가 올 전망인데, 한일 무역 분쟁이 촉발되면서 현재로서는 일본의 현재 사실상 유일한 실질적 통상 이민제도이자 취업이민 제도인 5년 이상 합법체류를 통한 취업 종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시 영주권이 발급되는 이민제도가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커졌으며, 더군다나 아베와 측근들 측에서 꺼내들 순차적인 잠정적 카드로 이미 발표가 된 지라 더더욱 대한민국 국내의 일본 취업 희망자들에겐 크나큰 차질이 생길 전망이다.
5. 개인적 성향
(1). 다혈질
방송 중 자신의 말을 끊자 방송용 이어폰을 뽑아버리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또,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굉장히 모욕적인 야유를 하기로 유명하다. 발언하는 야당에게 '에~?'라면서 비웃는 표정으로 비꼬거나영상 입헌민주당 의원에게 "공산당!"하고 소리친다던가, 공문서를 들고 나와 질의하는 의원에게 "니가 만든 것 아니냐"라고 하던가,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의 질의에 "의미없는 질문이야" 등이 있다. 이러한 괴팍한 성격은 측근인 세코 히로시게가 지적할 정도로 일본 정계에서도 유명한 걸로 보인다.
(2). 영어 실력
영어를 잘한다. 물론 일본식 억양, 발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영어 구사력이 좋은 편. 사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공부한 적이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첫번째 총리 역임 당시에는 외국관광객에게 환영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일본 관광청의 "요코소 재팬(Yokoso Japan)"의 일환이다.
(3). SNS 활용
페이스북을 비롯해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으로 하루 평균 1.8개의 페북 소식을 올린다고. '인터넷 재상'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인기를 누리는데 늘 휴대하는 태블릿 PC로 전직 관료, 현직 야당 의원, 한국 그 자체 등을 심하게 까내리면서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참 문제 많은 행태지만 일본의 보수와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아베는 "폭거다. 점령하는 쪽이 도발적 행동을 하면 몰상식하다"는 글을 올렸고 반나절 만에 2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연발했다. 일본에선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인 인터넷 활동이라, 분명 대중적 인기를 끄는 총리다.
요즘에는 페이스북보다는 주로 트위터를 통해 외교 정상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정책 홍보 글도 올리고 있다. 2019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2021년 10월에는 49회 중원선을 앞두고 유튜브를 개설하였다. 자신의 세이와 연구회 정책 공약이나, 지역구인 야마구치 4구의 선거홍보영상, 지지유세 등을 업로드 했다.
그의 암살범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준 것도 결국 SNS였다. 암살범은 암살 전날 저녁 발표된 그의 나라시 유세 정보를 전일 트위터를 통해 확인했고, 해당 지역 자민당 캠프로 전화를 걸어 확인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의 업로드는 다소 시간차가 있어, 일본 네티즌의 추모 댓글은 주로 마지막 게시물에서 이루어졌다.
(4). 영화광
소문난 영화광으로 알려져있다. 연평균 50회 이상 영화관에 방문하여 영화를 본다. 거의 1주일에 최소 한 번은 영화를 보는데, 공휴일을 이용하거나 공휴일이 없으면 수요일 저녁에 영화를 본다. 일본인들은 영화관에 잘 방문하지 않아 1인당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1회를 간신히 넘어 1.5회 정도 된다. 한국은 같은 지표에서 4.1회. 아베 신조는 전 세계 국가원수급 정치인 레벨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본다. 실제로 일반인 수준에서도 연평균 영화관 관람 50회면 이미 영화 관람 상위 0.1% 안에 들어가는 중증 영화광이다. 1년이 약 52주니까 거의 매주 한 편씩 영화를 꾸준히 챙겨보는 셈이다.
2018년 12월 31일은 부인과 이런 야심한 밤에 바나나라니 사랑스러운 실화(こんな夜更けにバナナかよ 愛しき実話)라는 영화를 보고, 2019년 1월 1일 새해 시작을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한 것도 아베의 영화광적인 성격이 드러난 면모이다. 일본의 영화관 표값이 2D 일반 영화도 1,800엔에서 2,000엔 정도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대한 지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TOHO 시네마즈와 이온시네마 두 군데를 이용 중이며, 둘 다 VIP 등급이 있는 것으로(정확한 등급은 불명) 알려져 있다.
아베의 영화 성향은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외국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다양한 편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잘 안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신조와 사이가 안 좋은 소노 시온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작품도 아베 신조가 보고 나서 가끔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아베의 영화광적 면모 때문에 일본 영화계에 대한 여러 지원책을 내놨고, 그 중 하나가 쿨 재팬 사업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화 시장 규모가 20억 달러 선에서 정체되는 등 커지질 못하니 아베 신조 본인도 안타깝다고 2018년 10월 국회 질의에 답변한 바 있다. 이때 아베는 "일본인들이 영화를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영화든 외국 영화든 여러 국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