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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1- 역사 (History)

[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러시아의 화약고가 된 배경은? 나토 가입여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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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러시아의 화약고가 된 배경은? 나토 가입여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란 국가의 개념을 허구라고 말했다. 그 기원 자체가 소련에 있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주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른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지만,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역사적 맥락 자체는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우크라이나란 국가는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우크라이나라는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엄연히 존재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에 저항하고 소련과 싸우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친서방과 친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본격화한 2014년 이래, 러시아의 개입은 우크라이나를 쪼개기는커녕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러시아'라는 별명

 

푸틴 대통령의 주장 자체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의 뿌리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러시아와 슬라브 민족의 발원지이다. 7세기 초부터 사방으로 분산해 이동하던 슬라브 민족 가운데 동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봉건국가가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키예프 공국(Kyiv Rus)이다.

 

북부 발트해(Baltic Sea)에서 남부 흑해까지, 동부 볼가(Volga)강에서 서부 티사(Tisa)강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에 편입한 키예프 공국은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고 비잔틴 문화를 도입해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하게 된다.

 

하지만 키예프 공국은 1223년부터 3차례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받고 1240년에 멸망하게 된다. 이후 몽골 지배를 피해 많은 인구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동북부로 이주하면서 현재의 모스크바 지역이 슬라브 민족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가 면한 흑해 연안 [구글지도 캡처]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 벨라루스 3국의 모태로 간주되는 배경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에는 누가 키예프 공국의 적자(嫡子)인지에 대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몽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지배기를 거치면서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구별되는 우크라이나인의 독자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어 16~17세기 우크라이나인 코작(Cossacks) 집단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황제와 페레야슬라브 협정을 체결(1654년)하게 된다.

 

이 협정은 코작 집단의 자치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것에 합의한 협약으로, 이를 두고도 러시아 학자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귀속된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우크라이나 학자들은 단순한 군사동맹으로 해석하고 있다.

 

 

소련에 맞서 태동한 우크라이나

 

[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러시아의 화약고가 된 배경은? 나토 가입여부?

 

우크라이나가 근대적 '독립 국가'의 모습을 잠시나마 갖추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도중 발생한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과정에서였다.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만들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소련과 싸우면서 탄생한 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의 제헌의회(라다)는 독립을 선언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때 우크라이나 의회에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이민자 공동체가 모여 있었다. 제정이 무너진 자리에 수립된 러시아의 임시 정부는 이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이 정부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다시 한 번 뒤집히면서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정권을 대상으로 독립 전쟁을 치른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내의 볼셰비키를 앞세웠고(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남은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에 의지했다. 그러나 동맹국이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후 처리에서 독립 보장을 받지 못하고 소련과 폴란드 등 주변국에 의해 분할됐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이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이자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편에 서서 민족국가로서 독립을 노렸다. 하지만 폴란드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동부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인정해 민족주의적 독립 시도는 결국 좌절됐다.



소련 내부로 편입됐지만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이 과정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인정받게 됐다. 1920년대에는 소련의 소수민족 국가 정체성을 존중하는 '토착화' 정책 덕택에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문화가 부흥했다. 이 정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1930년대 후반부터 독재 정권을 굳히고 '러시아화'를 채택하면서 무너졌지만 이 시점에 이미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소러시아'가 아니었다.

더구나 스탈린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착취했다. 대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진 1932, 1933년 '홀로도모르(대기근)'는 스탈린 정권의 잘못된 농업 정책과 농민 수탈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소 전쟁 도중 우크라이나로 진군해 온 나치 독일이 해방군으로까지 환영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치군이 우크라이나 농장과 산업 시설을 파괴하고,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저지르면서, 나치에 영합한 일부 극우 무장군단을 빼고는 우크라이나인은 독일에 동조하지 않게 됐다.

 

'소련 내부 존속' 원했던 우크라이나, '푸틴 러시아'는 거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 밖의 주권국가로 독립했다. 독립 우크라이나 자체는 결코 반(反) 소련, 혹은 반 러시아 성향으로 보기 힘들었다. 애초에 발트 3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련 내 자치적 국가로 존속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보수주의자 쿠데타와 이에 맞선 보리스 옐친의 대두로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도 자연스레 소련 내 다른 국가처럼 독립하게 됐다.

독립 이후로도 우크라이나는 친(親) 러시아와 친 서방 정권이 엇갈려 집권하면서 기본적으로 양측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3년 유로마이단 집회, 뒤이은 푸틴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과 돈바스 전쟁 등을 거치면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주의 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우크라이나 싱크탱크 라줌코프센터가 2016년 발표한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7%가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적 정체성과 관계없이 우크라이나 시민 모두"라고 정의했다.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가 우크라이나 국가를 구성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는 2007년 조사 대비 16.9%포인트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주권 자체를 무시하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대외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조슈아 터커 뉴욕대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만들려는 의도"라며 "군사 개입이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반응을 보면, 푸틴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독립성을 좌절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경하게 저항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러시아의 화약고가 된 배경은? 나토 가입여부?

 

올렉시 레즈니코프(Oleksii Reznikov)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최근 '애틀란틱 카운슬'에 '유럽의 미래는 우크라이나에서 결정된다' 제목의 기고문을 싣고 "크레믈린궁을 다루는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우리는 모스크바에 새로운 공세의 대가가 너무 높아서 고려할 수 없도록 확신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우크라이나가 왜 유라시아의 화약고가 되었는지를 "형제 러시아(brother Russia)"와의 관계, 핵무기와 국가안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과 푸틴의 '레드 라인',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무기화 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우크라이나 핵무기, 냉전 해체로 '서방 향한 창검'에서 '장물'로 둔갑

 

우크라이나는 볼세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소련)에 가입했으며 1954년 소련 정부는 페레야슬라브 협정 300주년을 기념해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1991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방을 탈퇴했다.

 

이때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이 서방을 향해 전진 배치했던 핵무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176기의 핵미사일과 1804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러시아와 미국 다음의 '넘버3' 핵강대국이었다.

 

냉전 시기 서방과 인접한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선 바르샤바조약기구(WTO)의 군사거점이자 그 자체가 서방을 향한 창검이었다. 연방의 일원인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에도 핵무기가 배치되었지만 우크라이나가 단연 수위였다.

 

구체적으로 1804개 가운데 1240개는 탄도미사일 SS-24 46기(1기당 핵탄두 10개씩 장착), SS-19 130기(1기당 핵탄두 6개), 그리고 나머지 564개는 크루즈미사일에 장착해 장거리 폭격기로 실어 나르게 돼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자 1994년 12월 미국, 영국,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등이 체결한 '부다페스트 안보보증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 on Security Assurances, 이하 양해각서)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모든 핵무기를 포기했고, 핵무기 해체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과 안전 보장을 약속받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이어 최근에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한 대가로 강대국들이 안전을 보장한 양해각서가 '종잇조각'이 됐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선 양해각서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카자흐스탄도 함께 체결한 것이다. 즉, 우∙벨∙카 3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는 대가로 미∙영∙러 3국이 우∙벨∙카 3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한 위협, 무력 사용에 대한 안보 보증을 약속한 양해각서인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 핵무기는 옛 소련군 연합기동 부대가 관장해 오다가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자 급거 철수하면서 팽개친 '버려진 물건'이었다. 비유컨대, 소련의 해체로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에게는 자고 일어났는데 마당에 '장물'이 떨궈진 셈이다.

 

소비에트연방을 구성했던 15개 독립 국가들이 소련의 붕괴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든 혼란기여서 러시아는 '버린 물건'을 회수하고 싶었지만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위험한 장물'을 놓고 치열한 수싸움을 전개했다. 러시아는 원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원소유권자는 러시아가 아닌 소련임을 내세워 연방의 일원이었던 자국에도 연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NATO는 혼돈기의 러시아에 '위험한 장물'의 관리를 맡기는 게 꺼림칙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위험한 장물'을 언제 팔아먹을지 모를 우크라이나에 맡겨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블랙마켓을 통한 테러리즘에 이용될 가능성을 염려한 미국과 영국이 중재에 나서 러시아 및 우∙벨∙카 3국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모여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이다.

 

물론 공짜가 아니었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핵무기 소유권 이전이 아닌 관리 차원에서 120억 달러의 보상금을 내걸고 '장물' 회수 작업에 나섰다. 미국은 3억 달러의 우크라이나 민생 안정기금도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핵무기는 국제기구 감시하에 러시아로 운반돼 해체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즉,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안보 보장 약속을 믿고 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장물'을 넘긴 것이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법적 구속력 없는 메모랜덤

 

문제는 이후 1999년 러시아에 과거 소련 붕괴는 잘못된 것이고 러시아는 1991년에 독립을 쟁취한 14개 국가들을 다시 편입해야 한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등장했고, 반대로 우크라이나에는 2004년 오렌지 혁명을 거치면서 친(親)서방 정권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소련 붕괴 이후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 국가를 NATO로 끌어들인 미국은 2004년에 발틱 3국과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까지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렇게 되자 불안해진 우크라이나는 인근 조지아와 함께 나토 가입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친서방 반정부 시민운동)이 발발하자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도주하면서 러시아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이때 푸틴 대통령은 정규군 대신 민병대를 침투시키는 이른바 '회색지대 전략'을 통해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크림반도를 빠르게 장악해 주민투표를 거쳐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러시아 처지에선 우크라이나 정부가 NATO 가입 신청 등 친서방 노선을 공식화하자, 러시아가 60년 전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이양했던 전략적 요충지를 다시 빼앗은 것이다.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 특별시(러시아 측은 세바스토폴 연방시)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주둔지로 유명하다. 시리아 내전 당시 러시아 지원 무력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는 이때 친(親)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동부 2개주(도네츠크주, 루간스크주)의 분리독립을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끝없는 내전으로 빠져들게 된다. 1만3000명 이상의 사망자와 난민이 속출한 이 내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4년 5월 당시 반군 점령지역(2개주의 40~45% 면적, 주민수 320만 명)은 러시아의 비호 아래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강행해 자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 및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PR) 정부를 수립한 상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와 유엔 등 국제사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서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을 약속했던 미국과 영국은 민병대를 앞세운 푸틴의 '회색지대 전략'에 제대로 된 군사적 대응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양해각서는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의 원칙에 따라 기존 국경에서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한다"(제1조),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 사용을 자제한다"(제2조) 등으로 돼 있다. 서명국에 대한 군사 지원의 법적 의무를 부과하진 않고 있다.

 

이때와는 반대로 미국이 인권 문제로 벨라루스에 제재를 가하자 벨라루스 정부는 미국의 제재가 양해각서 3조("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의 원칙에 따라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의 주권에 내재된 권리를 보장하고 자국의 이익에 종속되도록 고안된 경제적 강요를 삼간다")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스크(벨라루스) 주재 미국대사관은 보도자료를 내 "이 양해각서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동유럽의 인권 침해에 대한 조치와 양립할 수 있다"고 답했다. 미국 정부도 밝혔듯이, 무엇보다도 이 양해각서는 국제협정이나 국제조약이 아닌 '메모랜덤'이어서 당사국에 의무를 강제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이다.

 

양해각서의 서명 당사국인 미국∙영국을 비롯한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에 항의하며 비자 발급 중단과 해외자산 동결 등 외교·경제적 제재 카드로 압박했지만 푸틴은 꿈쩍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러시아의 화약고가 된 배경은? 나토 가입여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의지는 한층 강해졌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서두르는 것도 양해각서만으로는 안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레드 라인', 즉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간주하고 있다.

 

푸틴은 나토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러시아 국경 인근에 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법적 구속력 있는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EU는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안보 논의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헌법에 EU와 나토 가입을 국가적 목표로 명시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나토의 '파트너 국가'다. 나토 회원국이 우크라이나가 향후 동맹에 가입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서방 열강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도록 보증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동맹국은 우크라이나가 주권 국가로서 안보 동맹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며 가입 금지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나토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나?

나토는 수백 개의 전투기와 군함에 경계 태세를 명령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 배치 병력을 늘릴 예정이다.

이외에도 나토가 병력 4만에 달하는 신속대응군을 가동하거나, 폴란드와 발트 3국처럼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에도 추가 병력을 배치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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