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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교육학 (Pedagogy)/5. 홍익태권도 (Hongik Taekwondo)

[수련] 태권도의 역사 총정리

by hlee100 2019.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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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역사 총정리

 

1. 고대의 태권도

  역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 현대의 넷으로 나누되 편의상 나라별로 구분해 보면 고대는 삼국시대까지, 중세는 고려시대, 근세는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하 그리고 현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로 한다.

 

. 태권도의 발생

  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운동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활동을 통해서 성장 발달한다. 이러한 신체 활동은 예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무기가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 사회에 있어서는 갖자의 생활영위와 종족보존을 위한 식물의 획득, 외적방어라는 인간 본느의 생활요구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두수공원의 투쟁형태가 투기 또는 자위무술로 발달하여 시대의 유일한 체육적 활동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자신의 육체적 힘만으로는 동물보다 우세할 없음을 알아 명석한 두뇌로 무기를 발명하였고 단체의 힘이 개인의 히몹다 우세함을 알아서 집단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기 사용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튼튼히 하려 생존의식은 계속되었고 체력과 기술을 발휘하고자 하는 인간 본능이 앞서 개발된 투기나 자위무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시대는 농업을 위주로 하던 농경시대였으므로 천신, 태양, 산악 등을 숭상하는 원시 신앙, 인간 신앙이 유일의 생활이니만큼 오월 하종, 시월 추수가 끝나면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부족에 따라 부여에서는 동맹, 마한에서는 시월제, 신라에서는 가위라 불렀으나 같은 성질의 제례이었으며 힘과 기술을 겨루는 투기시함을 하였다하니 지금까지 전하는 농악, 씨름 민속놀이에서 자취를 엿볼 있다. 이러한 젲천대회에서 여흥적으로 즐기던 유희, ㅇ락과 투기 등이 점차 경쟁의식을 갖게 되어 경기로 발전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없다. 이러한 것은 다신교를 신봉하는 그리이스 인들이 여러 신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제전경기를 행한 올림피아경기를 통해서도 있다. 또한 부락의 단위가 확댇됨에 따라 국방능력과 전투 기능의 향상을 목표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 배양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을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제천대회의 체육활동 역시 투기를 중심으로 무술 경기를 중요시 하였다. 이에 따라 부족민이 무예수련을 생활로 삼았으며, 대회에 참석한 무사들은 그들의 기를 다루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제천 행사가 계속됨에 따라 신체 건강을 위한 양생술이 발전되었고 동작이나 힘이 우세한 동물의 , 자세 등을 자신의 투쟁경험을 위주로 체계화시켰으니 여기서 오늘날의 태권도가 싹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체육사> 시대의 환경, 조건으로 보아 각저 수박 등의 투기가 행하여졌다.’라고 기술한 것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태권도는 발생 택견, 턱걸이, 택건이, 수박, 태껸, 탁견 등으로 불리워 오다 태권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루려, 백제, 신라가 대내적으로 세력활장을 위한 영토분쟁과 민족 통일을 위한 각축전을 벌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외적에 대한 민족적 의식의 각성을 촉진시키기 위해 무술을 중심으로 체육활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의 시조 모두 무인이며 삼국사기 열전의 인사가 87명인데 무인이 60명인 것을 보아도 나라의 주인이 무인이었음을 있다.

  이렇듯 시대적 환경이 무예체육의 실행을 촉진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도 같은 동서고금에 빛나는 무인 청년단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의 무인들은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 수련으로써 태권을 행하였음을 고찰할 있는데, <해동죽지> 검술은 수술의 묘로부터 나온다.’라고 기술하고 있음은 수술이 검술의 기본이라는 증거의 하나이며, 무예서로서 정평이 있는 <무예도보통지> 의하면 태권(권법) 손발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사지와 몸의 활용법을 연마시켜줌으로써 무예의 초보와 토대가 되며 힘을 양성해 준다.’ 하였으니 당시의 무인들은 검술의 기본이나 무예의 초보로 태권을 실시하고 있었음을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무인들은 일찍이 부족국가시대로부터 무예의 기본이나 무술의 하나로 태권을 행하였음을 추정할 있다. 고대 부족국가시대는 부락의 부족들이 자위상 군장을 맹주로 삼아 족장에 복정하는 마음과 아울러 동기상부하는 사상에 기인한 자체 관념이 점차 발전하여 사회 윤리의 근원이 되고 문화 발달을 촉진한 무사도가 이루어지게 것이다.

  이러한 무사단 가운데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룬 것은 부족국가를 지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여 영토 분쟁과 각기 사회 문화의 발달을 이룬 시대로서 고구려는 압록강 건너 졸본천 기슭에서 B.C 18년에 나라를 세우고 신라는 한반도의 남동방 서라벌 일대에서 B.C. 57년에 나라를 이룩했다. 3국은 서로 영토를 넓히려고 뺴앗고 뺏기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 면서도 나름대로의 사회에 문화를 이룬 민족 국가로 성쟁했다.

  전기한 바와 같이 시대적 환경이 무예를 중시한 관계로 무예를 수련하는 무사단의 창설을 촉진하였으니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선배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이들의 심신 단련과 무예 수련의 방법으로 태권도가 행하여졌다고 추찰된다.

 

 

 

 

. 고구려의 선배 택견

  고구려는 원래 주위의 한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성장, 발달한 관계로 신라나 백제보다 기력이 있고 호전적인 국민이었다고구려는 초기에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2세기경 태주대왕과 차대왕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강력한 무사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강성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위해 창설된 것으로 풀이된다.

역사책에는 선배 선인, 조의선인, 백의선인, 예속 선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선인은 선배의 소리말 이요 인은 선배 배의 뜻을 빌려 이두문이여, 백의, 조의는 우리머리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절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자들ㅇ간에 선인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정병이라 하고, <삼국사기> 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 부르던 무사단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있다.

<해상잡록>에서도 명림답부 연개소문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라고 하였고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사실로도 선인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있다.

 

<조선상고사>에는 이에 대해 태조 떄에 와서는 매년 3, 10 신수두 대제에 모든 군중을 모아 칼로 춤추고, 활도 쏘며, 앙감질도 하였다. 또는 수박(태견) 하며, 강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였다. 가무를 연하여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여, 대수렵을 godgidku rm 잡은 양의 많고 적음을 보아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을 주어 처자의 생계르 ㄹ유지케 하여 가실에 누가 없게 하였다. 선배 자는 각각 무리를 지어 집에 먹고 자며, 안즈염 고사를 외우고 학예를 익며 나가면 삼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거나 ㅇ리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치 않았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 선배만은 출신의 미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인물된 사람이 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이로써 고구려에서 문과 대등한 무의 위치를 엿볼 있고, 오히려 무예를 중요시하는 진취적인 상무정신이 더욱 두드려져 있음을 있다. 무를 중시한 고구려에서 무예의 근간인 택견이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을 고증할 있는 유적으로는 통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시대 고분인 삼실총, 무용총, 각저총의 벽화를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생활 풍속을 나타낸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삼싱촐 3 거벽에는 무사가 맨손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무용총에는 현실과 주실 천정에 각각 장사가 겨루고 있는 그림 쌍방이 공력하려는 순가의 광경을 기운찬 필치로 그리고 있다.

무용총 주실 정벽에는 실내에서 주인이 접객하고 있는 그림이 있고 상부에 해태를 상징하는 조문과 좌우에 나무를 그려놓았으며 천정엔 앞에서 말한 겨루기 그림이 있다. 좌벽에는 수렵도가 있고 내부에 산과 노루와 같은 동물을 사냥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우벽에는 무용도가 그려져 있고 남쪽벽에는 나무 그림이 있다.

또한 각저총에는 사람이 해가 나무 밑에서 서로 잡고 씨름을 하는 그림 옆에 심판인 듯한 사람이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씨름과 태권도는 고구려 시대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있다.

이러한 그림은 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의 생전 행적이나 사람을 장례지낼 있었던 사실이나 행사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무용총에 있는 태권의 겨루기의 그림은 피장자가 생시에 택견을 하였든지, 아니면 장례 행사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무와 아울러 택견을 행한 모습을 그린 벽화라고 추정할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는 일찍부터 태양, 산악, 거목 같은 원시 신앙을 가져 신수도단전에서 매년 제례 경기를 거행하였고 경기와 수렵의 결과로 선배를 선발하였으며 택권도 중의 하나였음을 있다.

 

 

. 신라의 화랑과 택견

한반도의 남단에 위차한 신라는 건국 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이 없어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침입 세력 팽창과 영토확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무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신라의 무예라면 먼저 화랑도의 수련을 대표적으로 있는데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하여 12년에 이르러 풍류도, 풍월도란 민간청년 단체를 재정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랑도는 무사도의 용맹과 , 효를 기조로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였으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격도야와 심신단련에 힘써 국가를 이끌어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김춘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상고사> 기록된 바에 의하면 국선화랑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닮아 것이며 신수두 단전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며 수박, 격검, 기마, 덕견이, 꺠금질, 씨름 각종 경기를 하며 원근산수에 탐험하여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곳에서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 성곽이나 도로수축 등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아하였다.

또한 <팔관회교>에는 진흥왕 12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귀화한 혜량을 승통으로 팔관회를 만들었는데 불교의 팔제보다는 민간 신앙의 제천대회에 가깝고 군사적, 기무적, 수련적 기능을 가진화링이 참석했다.’ 하였다금강역사상은 경주박물관에 있는 동조인 금강역사상을 보면 공격과 벙어의 뚜렷한 자세를 엿볼 있다.

 

특히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주먹모양은 현재의 바른 주먹과 같고 밑의 손모양 역시 현재의 주먹과 같으며 동조 금강역사상을 보면 발을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어 현재의 태권도와 상당히 흡사함을 발견할 있다.

상기와 같은 사실은 시대의 불교가 단순한 종교로서가 아니라 호국사상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무예를 통하여 호국을 담당하는 무인들의 풍모나 기질이 불교와 영합하면서, 여기서 그들의 모습이 불교 조각에 등장하게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수박이란 용어와 덕견이(택건이) 같이 나타남을 보아 지금까지 체계가 불분명하던 태권이 신라로 넘어오면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분화되었다고 추측된다. 수박이란 손기술의 명칭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이나 상류층에 치중된 기술이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 수련으로 실시되었고, 일반 평민들은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었으므로 위력이 강한 발을 중심으로 술을 발전시켰다. 이는 태견이란 말이 이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솨 후일 말이 탁견이란 글자로 표기되었음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있다.

 

 

. 고구려 택견의 신라 전승

택견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되어 왔으며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을 있다.

첫쨰, 어원으로 화랑은 선랑이라고도 했으며 선랑의 음이요, ‘ 선인, 선배의 사람이라는 뜻을 취한 이두문으로 선배의 배와 같으며 화랑의 연원사를 선사라 함을 보아도 선랑, 화랑, 선배(선인) 같은 청년 무사단을 지칭함을 있다.

둘째, 화랑과는 선배의 조직과 상하 구분이 같다.

셋째, 신수두 경기에서 선배가 택견을 하였듯이 팔관회나 한가위 같은 모임에서 화랑이 겨룬 경기에 택견(수박, 덕견이, 택건이) 포함되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2세기경에는 예부터 내려오던 투기가 택견으로 체계화되어 선배를 무예의 기본으로 행하고, 4세기부터는 태학과 경당에서 체계적인 무예를 교육함으로써 더욱 발전하여 무용총 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되었다고 한다.

, 택견은 신라에 전해져 더욱 발전하였으며 손기술과 발기술이 나누어져 조직적으로 체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의 조각이나 불상에 있는 인물의 동작에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다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있다.

 

 

 

2. 중세의 태권도

삼국시대에 기본동작, 손기술 그리고 발기술로 분화 발전된 택견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승, 발전되었다. 특히 구려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475년간 존속하면서 우리 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시대는 삼국을 거친 택견이 기초 단계를 넘어서 무예적 가치를 인정 받아 벼슬과 직결될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으며 기술과 위력도 인명을 살상할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수련 형태 또한 오병수박희라 하여 실전에 응용할 있는 집단대련으로 발전하였다 당시는 사회가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을 필요로 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재만 있으면 군사로서 특별 채용될 있었다.

 

의종은 이의민이 수박(택견) 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든지, 최충헌이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설하고 중방의 힘센 자로 하여금 수박희를 가지고 이긴 자에게 교위나 대정의 벼슬을 주었다거나 변안렬이 임견미, 염흥방 등과 수박을 하여 이긴 결과로 밀직부사에서 밀지가사로 승진하였다.함은 직위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수박(택견) 잘하면 벼슬을 얻거나 승진할 있었음을 말해주며 택견의 승부로 벼슬을 주거나 진급을 시켰다고 함은 승부를 가리는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이 있었음을 뜻한다고 태권의 경기화 내지 스포츠로서의 기반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야아 것이다.

 

<고려사> 보면 수박의 위력에 관해 이의민과 경승이 자리를 같이 하여 서로 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했으며, 이의민이 맨손으로 사람의 척추를 쳐서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도 격파와 같은 단련을 통해 택견의 위력이 인명을 살상할 있을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달해 있음을 말해준다. 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창 도중에 오무넌에 이르러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를 하도록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단체대련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대상이 문신과 무신인 점으로 보아 대신 모두가 수박희를 정도로 필수 무술이었음을 있다. 충혜왕이 상춘정, 화비궁, 마암 등에서 수박희를 보았다 하였으니 왕이 거동할 때는 항상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할 있는 시범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던 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는 왕이 수박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있다. 이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군인들이 모두 수박희를 필수 과목으로 행하여 하면 특진을 시킬만큼 중요시 여긴 무술 종목이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수박희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고 군사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며 왕이 직접 관람할만큼 스포츠적 성격을 띠었고 벼슬과 직결될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다. 전신에서 나오는 위력도 대단하여 사람을 죽이고 벽을 뚫을 만큼 고도의 기술을 지녔고 기술도 오병수박희처럼 실제적 응용을 위주로 하는 집단 훈련제가 실시되었음은 특기할만 하다. 이렇게 발전해온 수박은 고려 말에 이르러 화약이 발명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무재 또는 무예적인 비중이 줄어드는 반면 민속 경기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여 갔다.

 

신채호 선생은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오고 있다하였고 <고려사>에는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을 내기한 자는 각각 곤장이 일백이라 하였다.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왔다하는 기록은 고려의 서울인 송도에서 민속으로 수박경기가 비롯되었음을 말해주며 백성들이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을 내기하고 있어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함은 많은 백성들이 이를 민속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3. 근세의 태권도

초기에는 무예를 중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주력하였으나 화약 발명에 따른 새로운 무기의 사용도가 높아지고 군대조직이 정비되자 태권과 같은 맨손무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다구나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삼고, 배불숭유의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연등회, 판관회 국가적인 행사가 폐지된 무예의 진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기타 역사 문헌들이 입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실록에서 보면, ‘담양의 향리 단노 등이 국가에서 시험을 보아 군사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여럿이 모여 수박희를 벌였다하고,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북쪽 12 충청도 은진현 경계에 있는 작지 말을에서는 매년 7 15(백중)이면 근방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수박희를 행함으로써 승부를 겨룬다.’, ‘병조(국방부)의흥부에서 수박희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 자를 채용하였다.’, ‘임금(태종) 잔치를 베풀고 갑사 방패군으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록 하고 구경했다.’,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갑사를 뽑되 의흥부 병조의 무사를 모아 홍인문 안에서 기사, 보사로서 갑사를 충족시켰다. 이에 뽑히지 못한 자는 3군의 부령 주보를 삼고 수박희로 3 이상을 이긴 자는 모두 합격시켰다.’, ‘시위군사에게 수박희를 시키고 상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용제총화>, ‘어함종은 어릴 때부터 기운이 장사였다, 그는 날마다 수박희를 행하는 것이 일과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 수박희가 일반 대중 사이에 널리 보급되고, 정부의 관리 채용에도 특기를 인정받고 있음을 있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잡혀 안정을 찾게 되고 군대조직이 정비되면서 화약의 발명과 새로운 무기의 사용으로 수박희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으며 위정자들은 문치와 당쟁에 휘말리고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군제를 재정비하고 , , 등의 고대적 무기 외에 화포, 대통, 창술, 택견(권법) 무예를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드고 5부의 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과 ㄴ또는 속오군이란 것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정조 이르러서는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무과를 두어 평소 군사훈련과 무예수련을 장려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등을 시켜 <무예도보통지> 무예서를 만들었다. <무예도보통지> 4권에 권법이란 이름으로 태권의 품새와 동작을 싣고 있는데 이때 기효신서, 무편, 내가권법 중국서적을 참고한 관계로 중국의 용어를 그대로 빌어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국가의 장려에 힘입어 택견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순조 유숙이 그린 대쾌도를 보면 당시의 씨름과 더불어 택견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택견의 실시 방법에 대하여 <해동죽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해동죽지> 탁견희조에 풍속에 각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대하고 서서 서로 거꾸러 뜨린다. 이것을 탁견이라고 하며 방법에는 가지가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며 비각술이 있는 자는 상투를 차서 떨어 뜨린다.’라고 하였다.

 

수벽타조에는 풍속에 수술이 있는데 예쩐 칼쓰는 기술로부터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손기술이 있는데 손이 왔다 갔다 때에 만일 손이라도 법에 어긋나면 타도를 당한다. 이것을 수벽타라고 한다.’, 하였으며 척장군이 많은 군사에게 기술을 가르쳤는데 절구에 구절만 어듯나면 깜빡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ㄸㄹ어진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련의 방법을 손과 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ㅇ므을 있다.

이러한 택견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개화됨에 따라 군인의 무예로서 보다는 민속경기나 어린이의 유희로 실시되었다. 신채호는 지금의 송도 수박은 고구려 선배의 유퓽이다.’ 하였으니 군사적, 무예적 기능보다는 민속적, 유희적인 기능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최남선의 <조선 상식 문답>에는 수박은 본래 무예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동의 놀이가 되었다.’ 하였으며 <재물보>에는 수박은 지금의 탁견과 같다 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체육 운동이 조직화되자, 그들은 우리의 운동회나 민속놀이까지도 탄압하였다. 태견도 예외는 아니어서 금지되었으나, 사범들에 의해 비밀리 전승되어 내려왔다.

 

현존하는 인물로 당시 택견을 배워 민속경기에 참여한 송덕기옹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기방법은 동리 간에 심사오 명의 선수를 선발하여 이긴 사람은 그대로 다른 사람과 계속 싸우는 식의 승발전이었다 하며, 이긴 동리에서는 승전의 영웅과 같은 환대와 대접을 며칠 동안이나 선수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옹에 의하며 ㄴ그에게 태껸을 가르친 사람은 임호라는 사람으로 택견기술이 뛰어나 짚단을 타고 담장을 뛰어 넘으며 소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나는 범과 같았고, 사방의 적을 양손으로 어르고 왼발 바른발로 넘기는 기술이 번개치듯 했다.” 한다. 시범 때에 송덕기웅의 몸놀림은 8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심히 부드럽고 율동적이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태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제의 주재소(파출소) 수라쳬 불려다니며 감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어니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4. 현재의 태권도

해방과 더불이 민족문화와 전통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정리가 되어감에 따라 예부터 내려오던 민속경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예뿌터 태껸 수련하던 분들이 나타났고 송덕기 같은 사람은 대통령인 이승만의 생일날 우리의 태권도(태껸) 시범을 보여 한국 태껸과 가라데의 다른 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 전문인들에 의해 태권도장이 개설되었고, 6.25동란까지 초보적 발전단계를 거치다 6.25 후에 시국의 안정과 더불어 점차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점차 수련생이 늘고 도장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자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1961 9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65 8 5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2 6 20일에 대한체육회의 경기 단체로 대한태권도 협회가 가입승인을 받았으며 1963 10 4 44 전국체육대회에는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참가한 1964 9 3 45 전국체육대회부터는 정식경기종목이 되었다. 당시 체금은 플리이급부터 헤비급까지 7체급의 개인전을 실시하였고 기술의 정도에 따라 중기부(1-2) 고기고(3 이상) 구분하였다.

 

 

1966년부터는 대통령기쟁탈 전국단체대항태권도대회(1966. 10. 28) 1968년부터는 주한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1968. 6. 16), 1870년부터는 전국국민학교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1970. 10. 24) 함꼐 여자부 태권도 개인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63년부터 협회의 종별선수권대회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부를 1974년부터 대학태권도연맹에서 대회를 주최하게 되었고, 전국체육대회도 일반부에 포함되었던 대학부를 독립 설치하게 되었다.

 

이같이 국내의 태권도가 각계 각층으로 확산되어 보급되는 동시에 군에서도 태권도의 우월성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정식수련종목으로 선정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응용, 실전에서 적을 제압함으로써 한국 군인과 태권도는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발전되어 태권도는 점차 가치를 인정받아 근래에 이르러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부의 국민 체력 향상 정책과 체육인구의 저변 확대에 발맞추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태권도 기술의 우월성은 물론 심신수련, 인격도야, 체력향상이라는 목적이 높이 평가되어 1971년에는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태권도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와 경찰 뿐만 아니라 학업에 전념하는 학생들까지 실시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국내에 200여만의 수련생과 50여만의 유단자를 배출하였고 해외 102여개국에 2,000여명의 사범을 파견하여 50여만의 수련생을 지도하고 있어 민간외교와 국위 선양에 몫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고 1973 5 28일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는데 현재 회원국의 수는 179여개국에 달하며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1973년에는 1 세계선수권대회를 창설하여 2년마다 대회를 열고 있다. 1985 9 7 세계선수권대회시까지 계속 7연패함으로써 종주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74년부터 2년마다 아시아 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세계의 대륙마다 지역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태구너도가 미국체육회(A.A.U)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 1976년에는 국제군인체육회(C.I.S.M)에서도 정식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79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의 김운용 총재가 세계비올림픽 종목연합회의 회장에 신임되었고 1980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 IOC 정식 승인 단체가 되는 동시 태권도 종목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1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1 월드게임에서는 태권도가 9개의 메달을 획득, 한국이 종합 2위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83 812일에는 판암게임에도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6 9 우리나라 서울에서 개최된 10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8체급 7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본을 앞지르고 우리나가 아시아 2 스포츠 강국이 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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