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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문학 (Humanities)/1- 역사 (History)

[역사] 이집트 문명 발전, 역사 총정리

by hlee100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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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명 발전, 역사 총정리

이집트 문명 발전, 역사 총정리

 

  이집트 문명은 세계에서 2번째로 긴 나일감의 범람으로 풍요로운 나일강 제방과 삼각주 지역에서 일어난 문명을 일컫는다. 이 지역의 엄청난 농업 생산량으로 이집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헤게모니(주도권 혹은 패권)를 누려왔다.

 

 

1. 기원전 3100년 이전 - 선사시대

2. 기원전 3100 ~ 기원전 332 | 고대 이집트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3. 그리스(헬레니즘) - 로마 시대

4. 이슬람 시대 (641 ~ 1798)

5. 근대 이집트 시대

6. 현대 이집트 시대

 

 

 

1. 기원전 3100년 이전 - 선사시대

  이집트의 대부분 수렵채집부족과 어민부족들의 문화는 기원전 1만년 경에 농업부족문화로 대체된다. 농업 부족은 보통 곡물을 빻아 가루로 만들었고 이것이 주식이 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6000년경에 지구 자전축 등의 변화와 아프리가의 습윤기후가 멈추고 변동으로 사하라 사막이 형성된다. 기존 사하라 사막 지역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나일강변에 이주했고, 농업 정착 경제 체제가 자리잡으며 중앙집권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 나일강 전역에 신석기 시대(구석기는 뗀석기를 사용, 반면 신석기는 간석기 사용 및 토기 사용)가 시작된다.

 

  이 즈음 이집트 상부 지역에 '바다리 문화'와 그 뒤를 '나카다 문화'가 발전하고 하부에는 '바다리 문화'보다 700년 앞선 '메리므다 문화'가 발전했는데, 이 둘의 문화는 이후 고대 이집트의 전신이 된다. 상부, 남부 각 이집트 문화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 행정자치를 누리며 2천년간 공존하며 발전한다.

 

좌 - 사하라사막 위치 지도 우 - 이집트 선사시대 유물들

 

 

2. 기원전 3100 ~ 기원전 332 | 고대 이집트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상하로 나뉘어 있던 두 문화는 기원전 3150년경 메네스(혹은 나르메스)라는 인물이 통일함으로써 '메네스 왕조'가 시작된다. 이로부터 이집트 왕조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최초 통일 왕국이 세워졌으나, 3천년 가량 여러 왕조가 번갈아가며 문명을 이어간다. 이집트 통일 왕궁은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로 나뉜다. 메세르가 통일이후 약 1000년간을 고왕국이라 한다.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의 시기동안 이집트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종교와 미술, 언어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1). 기원전 32~22세기 | 고왕국 시대 (제 1~6 왕조)

  이 고왕국 시기 동안의 수도는 멤피스였다. 이 시기 동안 피라미드가 많이 세워지는데, 절정을 이룬 것이 이집트 제 3왕조의 조세르 피라미드와 이집트 제 4왕조의 기자에 세워진 피라미드 군이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인 왕의 무덤이지만, 모든 무덤과 왕릉이 피라미드는 아니었고 12왕조 이후 피라미드는 더 이상 무덤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피라미드를 세계적으로 잠깐 살펴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는 이집트 문영의 피라미드와 생김새와 구조가 비슷하다. 물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제일 유명하지만, 역사 속 다양한 문명에서 다양한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신기한 점은 심지어 이런 큰 문명들이 서로 접촉했거나 교류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대도 지리도 제 각각 다 다른 문명들은 공통적으로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은 남겼다. 메소포타미아에는 5천 년 전 지구라트가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지을 때, 메소포타미아에는 지구라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2천 6백 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마야 문명도 피라미드를 짓는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 사제들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 것처럼, 마야 문명에서도 지구라트 같은 건축물에서 사제들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냇다. 그리고 기원전 250년경 중앙아메리카의 테오티우아칸 문명(기원전 100~600년)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었다. 이곳은 화산 폭발이 있는 지역이라 피라미드의 재료로 딱딱하게 굳은 용암을 사용했다고 한다. 50년 만에 완성된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는 높이가 64m에 가깝고 365개의 계단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왕 파라오(Pharaoh)는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신이기도 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인 조세르(Djoser)의 피라미드이다. 파라오의 위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왕의 재하인 임호텝이 6층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초기의 피라미드 형태이다.

  4왕조가 시작된 스네페루 시대에 기원전 2600년경 고대 왕국은 계단 피라미드가 아닌 굴절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굴절 피라미드에 대한 엔지니어링 경험을 얻은 당시의 건축가는 보다 완전한 형태의 붉은 피라미드를 완성한다. 스네페루 이후 이집트 사회는 더욱 안정되고, 강력 하고 나중에 왕들은 피라미드를 더 높이 쌓기 시작했다. 쿠푸왕과 멘카우르왕 모두 기자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한다.  피라미드 단지는 인류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평균 2.5톤의 돌이 쌓여 그 수는 최대 230만개이며, 기원전 2550년경 지어진 쿠푸왕 피라미드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건물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거대한 피라미드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 기자 지구에는 머리에 사자의 몸을 얹은 거대한 스핑크스가 있다. 스핑크스는 바위 산 전체를 조각하여 만들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었으며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역할을 갖는다.

  고왕국 5왕조에 들어서면서 피라미드 건축은 점차 쇠퇴 하고,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데 더욱 집중하게 된다. 이제 옛날 피라미드보다 세련된 신전을 더 짓는 것이 트렌드가 된 것이다. 또한 이전 파라오의 번영과 국력이 약해지면 왕관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권력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이 무렵, 갑작스런 가뭄이 나일강에 기근을 가져오면서 1000년 이상 이어진 고왕국은 격동의 시기로 접어든다.

 

 

(2). 기원전 22~21세기 | 제1 중간기 (제 7~10 왕조)

  고왕국과 중왕국, 신왕국 시대 사이에 이처럼 '중간기'라 불리는 혼돈의 시대가 있다. 제 6왕조 시기 페피 1세와 2세의 지나친 장수에 따라 후계구도 관련하여 왕권이 무녀지면서 지방 총독들이 할거하여 내전을 벌이는 혼란이 시작된다. 또 동시에 갑작스러운 극한의 가뭄과 기근으로 암흑기가 찾아왔고, 광활한 사막과 뜨거운 기후에 서로를 인신공격하며 잡아먹는 처참한 상황까지 몰리니,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키는 시기이다. 146년의 제1중간기에는 70일간 70명의 파라오,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설칠 정도로 혼돈의 시대였던 것이다. 제 9, 10 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지배했다.

 

 

(3). 기원전 21~18세기 | 중왕국 (제 11~12 왕조)

  약 140년간의 제1중간기의 혼돈이 진정된 것은 11왕조 때 멘투호테프 2세 왕이 통일에 성공한 후 중왕국 시대가 도래할 때부터이다. 그는 새로운 수도인 테베를 통치했지만, 멤피스 상류에 위치한 이 안정된 중왕국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시기에도 누비아나 시리아, 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뤄졌으며, 또한 아시아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미리 후계자를 파라오로 승격시켜 재위가 겹치는 공동통치를 구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4). 기원전 18~16세기 | 제2중간기 (제 13~17왕조)

BC 1674년 청동 무기와 불의 탱크와 같은 전차기술로 무장한 힉소스인은 이집트를 다시 정복하게 된다. 13왕조와 14왕조가 차례대로 지나고, 15왕조를 시작함으로 힉소스 왕이 다스리던 100년의 기간을 제2중간기라 한다. 그들의 전차, 강력한 화살, 갑옷, 금속 투구, 청동기는 새로 들어온 문물로써, 훗날 이집트의 후속 정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혁명에 가까운 군사 기술을 채택했지만, 그들의 야만적인 통치는 이집트를 다시금 큰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5). 기원전 16~11세기 | 신왕국 (제 18~20왕조)

기원전 16~11세기 이집트 신왕국 (제 18~20왕조)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 군대를 물리치고 18왕조를 세우면서 BC 1567년에 신왕국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만물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와서 부활할 수 있도록 몸을 조심히 보관하여 미라화하는 문화가 이 시기에 발달한다. 거의 5,000년에 걸친 미라화는 가장 독특한 전통 고대 이집트의 문화이다. 또한, 신왕국의 왕들은 대부분 영토 확장에 헌신했다.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의 침략을 받은 굴욕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 그리고 이집트의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이집트의 자존심 회복을 의미했다.

  신왕국에서 가장 광대한 파라오 중 하나는 신왕국 시대의 유일한 여왕인 18왕조의 '하트셉수트'였다. 이집트의 전성기를 군사력이 아니라 소밀리아와 무역로를 열어 무역을 통해 시야가 넓힌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외부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모두가 풍요롭게 살았다. 제 18왕조는 270년 존속했으며 제 19왕조에서 람세스 2세 때는 최전성기로 유명하다.

  18왕조의 왕들은 대부분이 위대한 전사들이었고 그 중 최고의 전사는 투트모세 3세였다.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쳐 이집트 전성기에 신과 왕이 누렸던 권력의 크기는 거대한 사원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사원인 카르는 천백 년에 걸쳐 확장된 사원이다.

  한편, 이집트의 거의 모든 왕이 숭배하는 신은 아몬 신이었고, 제 18왕조 말기 아멘호텝 4세는 정치와 종교에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아멘호텝 4세는 '아몬'신을 버리고, '아톤'신을 숭배하고, 이름을 '아케나톤(Akhnaton)'으로 변경하고 수도를 Amarna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아톤신의 숭배는 점차 Akhnaton 자신을 숭배로 변질된다. 이러한 개혁으로 그는 종교 세력을 억압하고 군주제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정치 및 종교계의 큰 저항에 직면하고 결국 '아케나톤(Akhnaton)'의 죽음과 함께 종교 개혁은 실패한다. 하지만 이 유일신은 나중에 모세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케나톤의 후계자인 다음 왕은 약 10년 동안 통치하고 18세의 소년의 나이에 사망한다. 바로 소년 왕 투탕카멘이다. 투탕카멘이 유명한 이유는 이집트 파라오 중 1922년에 영국인에 의해 완전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무덤에는 손대지 않은 많은 보물이 있었고, 미라가 된 투탕카멘의 얼굴은 황금 마스크로 덮여 있었다. 투탕카멘의 시신은 한쪽 머리를 세게 맞고 뼈가 부서져있었기에, 투탕카멘이 암살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고대 왕국에는 사료부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면, 신왕국에는 가장 큰 땅과 화려한 문화가 있다. BC 1318년에 시작된 19왕조, 람세스 2세 신왕국 전성기의 대표적인 파라오였다면 람세스는 약 66년 동안 집권했고 많은 기념물을 지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는 아부심벨 신전이다. 이 신전은 암벽을 파서 만든 석굴사원으로  20m 높이의 4개의 동상은 모두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자 했던 람세스 2세의 가족상이다.

 

  한편, 람세스 3세 시기에는 연류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을 짓는 공사 도중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예정이던 봉급을 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봉급을 주기 전에는 일을 할 수 없다며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성공했으며 노동자들은 밀린 봉급을 정상적으로 받았다.

 


(6). 기원전 11~4세기 | 제3중간기, 고대 이집트 종말 (제 21~29왕조)

  19왕조는 승계문제로 무너지고 20왕조가 등장하고 리비아와 바다민족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전문문명파괴자 <바다민족>: 강대한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집트에 큰 피해를 준 후 소멸) 결국 바다 민족의 리디아와 누비아의 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고대 이집트의 가장 찬란했던 신왕국 시대의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영광시대는 점차 무너지고 신왕국 번영의 시대는 역사의 무대 뒤에서 사라진다.

  거의 4세기에 걸친 외세 통제의 혼란 끝에 이집트는 왕조 말기 시대에 접어 들다 앗수르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다. 기원전 7세기(664년)부터 말기왕조인 26왕조(사이스 조, 상인왕조)는 정체된 이집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한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최초의 운하 건설 시도, 후세에 수에즈 운하 건설의 거점이 된다.

 

 

 

 

3. 그리스(헬레니즘) - 로마 시대

 

(1). 기원전 332 ~ 기원전 30년 | 헬레니즘 시대 (프롤레마이오스 왕조)

  지금 이집트 30왕조로 내려가고 있다. 기원전 525년, 가장 강력한 적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략하고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도시로 선언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운하 공사 재개(수에즈 운하)한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가혹한 통치에 지쳐 이집트인들은 독립을 위해 끝없이 싸웠다. 페르시아의 쇠퇴와 함께 잠시 짧은 독립(28~30왕조)을 해내긴 했지만 결국 저항에 성공하지 못한 이집트인들은 다른 나라가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기를 바랬다. 마침내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찌르면서 이집트는 마침내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해방된다. BC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해방시키면서,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대했다. 또한 알렉산더 역시 이집트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했고, 이집트인들은 그를 왕으로 섬기는 것을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고대 사회에서 그리스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며, 이집트 문화가 점차 변모하면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수백 년 동안 지중해의 중심이 된 시기이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된다. 마케도니아계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와의 연속성을 지켰갔다. 기원전 288년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100미터 높이의 파로스 등대까지 건축한 것을 보면 이집트 시대 중 가장 발전된 문명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가 클레오파트라이다. 하지만 통치 말기 왕실 내부에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고 부패가 심화되자 이집트인들은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키면서 쇠약해져 결국 로마에 정복된다.

 

 

(2). 기원전 30 ~ 기원후 641년 | 로마 제국 시대

  로마 영웅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장악했지만 이집트 왕위와 이집트의 독립을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이집트인이 아닌 로마인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완전히 끊어지고 이집트가 로마의 영주로 전락하게 된다. 이집트는 로마의 한 지방 영주 지역으로써 끝없이 밀과 파피루스를 제국에 상납했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반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인들은 수차례 폭동을 일으켰다.

  로마가 이집트를 동화시키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처럼 이집트 신들을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에 큰 변화였다. 그 후 전통문화와 로마,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의 혼합이 이집트 문화에 뿌리를 내렸다.(고대 이집트의 전통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추후 이집트를 통치한 이슬람 제국은 이집트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이슬람 시대 (641 ~ 1798)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이슬람 시대의 맘루크 왕조의 이슬람 건축물들이 함께 있다

(1). 통일 이슬람 제국시대

  이슬람 발흥 이후 640년경 아랍인의 침공을 받아 아랍 치하에 들어선다. 이슬람의 도래도 이집트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로 인해 기존의 이집트 문화에 로마,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가 뒤섞이면서 현재 이집트 문화의 뿌리를 다지게 된다. 다만 변하지 않은 사실은 여전히 이집트는 가장 번영하고, 강성하며, 알토란 같은 핵심 지역이며 각 왕조 아래서 번영을 지속하였다는 점이다.

 

  이집트를 통치한 이슬람 제국 아무르는 아름다운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이슬람 제국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결국 멤피스 푸스타트 근처에 푸스타트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3 세기 동안 행정 수도이자 상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이집트는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를 거치면서 아랍인들이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다. 기존의 이집트인들은 아랍인들과 경쟁하면서 지배계급에 오르기 위해 기존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여, 아랍어와 이슬람교가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의 언어와 종교가 된다. (오늘날 이집트인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이고 약 10%가 기독교인)

 

 

(2). 파티마 왕조(963~1169)와 아이유브 왕조(1169~1252), 그리고 십자군 전쟁

  10세기 초(969년) 이집트는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의 통치기에 들어간다. 그들과 같은 알리의 후손만이 이슬람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집트를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 요새 도시인 카이로를 수도로 세웠다. 카이로가 점차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알 아즈하르 대학(972년 건립, 982 설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만들어진다. 이 대학의 이름을 직역하면 '가장 꽃이 만발한'이란 의미이다. 건국 번영을 누렸던 파티마 왕조는 결국 십자군에 의해 멸망하고 살라딘에 의해 파괴된다.

  1169년 술탄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카이로를 수도로 지정했다. 이로써 시아파 시대는 끝이 나고, 수니파 시대가 돌아왔다. 십자군과의 전쟁은 아이유부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휴전과 개전을 거치며 진행된다.

 

 

(3). 맘루크 왕조(1250~1517)

  그러다 다시 1250년부터는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했던 맘루크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맘루크 왕조를 세우고 아이유비드 왕조를 몰아낸다. 1250년 노예가 지배하던 이슬람 왕조 맘루크 왕조 시대가 열렸다. 여러 기준에서 이 시대의 "노예"(투르크인들과 치르케스인들이 다수)는 결혼, 사유재산,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고 심지어 공직의 참여가 허가되었으며 노예 해방도 권장되었다. 심지어 칼리프의 경우 여자 노예 소생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권력투쟁의 승자가 술탄의 자리를 차지했다.

 

  아랍인들의 많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는 아인 잘루트 전투(1260년)에서 몽골의 훌라구의 일 칸국을 물리치고 다음 해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를 복원하며 세력을 떨쳤다. 맘루크의 분투로 이슬람 세계는 사라질 수 있는 대위기에서 구해진 것이다. 이후 맘루크 왕조는 실질적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큰 번영을 누렸다.

 

1382년 투르크족 중심의 바흐리 맘루크 조가 서카시아 인과 그리스계의 주축인 부르지 맘루크 족으로 왕족이 대체되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티무르의 강성함에 다마스커스를 잃었으며, 티무르가 중국 원정을 기획하면서 점령만 면했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맘루크는 다시 세력을 되찾았다. 맘루크는 멸망 직전까지 인도양과 지중해 전반에서 강성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4). 오스만 제국 왕조

  15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번영했던 맘루크 왕조도 중개무역에 큰 타격을 입고 쇠약해졌다. 1492년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하여 매일 10,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과도한 세금수탈과 왕실의 사치가 반복되어 1516년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미 동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은 무기인 대포와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군에 기병 중심의 맘루크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듬해 이집트는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주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잘나가는 속주였던 이집트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면서 군벌(사라지지 않았던 맘루크)들이 득세하였고, 알리 '베이'(군사 지도자) 때는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였다(1770년). 그러다가 1798년 6월,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에 걸려 군벌들과 친오스만 총독들이 함께 박살나면서 아주 잠깐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프랑스군은 1801년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799년 로제타 석이 발견되면서 이집트 문화는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원정은 잠시 이집트를 프랑스의 영향 아래 놓였다. 프랑스의 짧은 점령 기간 동안 혁명 사상이 이집트로 흘러 들어 왔고 이집트 사람들은 봉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집트와 아랍의 근대사에 남을 인물이 떠오른다.

 

 

 

5. 근대 이집트 시대

무함마드 알리 시대의 팽창 (빗금) / 1880년경 이집트 영토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 것은 1805년 알바니아의 사령관 무하마드 알리가 국민의 혁명과 지지를 받아 이집트의 총독이 되고부터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1250년부터 이집트를 지배했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는 등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한 서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지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렀다. 그리고 1832년에는 레반트와 헤자즈를 정복해버림으로써 오스만 제국과 완전히 갈라섰으며, 1839년 시리아 반란을 빌미로 침공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영국의 중재로 시리아를 반환하고 1841년 독립하게 되었다. 또한, 세계 교통의 이정표인 '횡단철도 완공'과 이집트 수에즈 운하 개통을 완수했다. 이후의 이집트는 근대화를 통해 산업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남북전쟁 기간 동안 면화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미국의 면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또한 과도한 강제 노동으로 수천 명의 이집트인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정부는 파산하게 된다. 결국 수에즈 운하를 탐내던 영국에 주식을 팔아야 했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면서 영국은 점차 이집트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결국 1882년 내부 반란을 영국군이 대신 진압해준 뒤, 1914년 영국은 합병을 시도한다. 이집트를 왕실 식민지로 삼으려하자 이집트의 맹렬한 반대에 결국 실패했지만 이집트는 완전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이 때 전 세계에 스며든 민족자결주의 열풍이 이집트에서 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이집트인들은, 영국의 지배에 분노하여 독립에 혁명을 일으키고 1922년 마침내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했지만 1936년에 영국군은 여전히 수에즈 운하에 주둔하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영국에 본의와 상관없이 끌려가게 된다.

 

  한편 근대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입을 목격한 이집트 지식인들은 서구와 이집트의 기술 격차에 큰 충격을 받고 이슬람 사상의 근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알 아즈하르 대학의 셰이크였던 무함마드 압두는 서구의 모더니즘 철학 사조를 이슬람에 도입하고 중세 이후 순니파 세계에서 사멸되었던 무타질라 학파를 부흥시켜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의 기원을 이루었다. 이후 근대 이집트는 진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모더니즘이 발전하며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의 근대화 및 지적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된다.

  19세기 이집트의 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슬람권의 세속주의 살라피즘, 이슬람주의에 모두 깊은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세속주의-민족주의 성향의 이집트 문인 타하 후세인은 파라오의 입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종래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가치관과 완전히 대치되는 소설을 쓰고 히파티아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하였으며, 무함마드 압두의 제자이자 시리아의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 라시드 리다는 현대 살라프파의 기반을 다졌다. 반서구 감정이 강했던 이집트 민중의 입장에서 이슬람 모더니즘을 이해했던 하산 알 반나는 전통적인 이슬람 사상에 레닌주의의 민중 해방론과 방법론을 접합하여 무슬림 형제단을 창단하여 이슬람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6. 현대 이집트 시대

 

(1). 가말 압델 나세르의 시대(1952~1971)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은 아랍 연합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고, 그리고 소위 1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약한 이스라엘 군대와 영국 교육을 받은 아랍 5개국 정규군 사이의 전투는 얼핏 보면 게임이 안될 것 같지만, 반전으로 결국 이스라엘군이 절망 끝에서 두 도시를 지켜 냈고, 아랍 연합군은 상호 불신으로 분열되어 결국 파루크 1세를 물리치고 말았다.

  1952년 이집트의 군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1956년에 대통령이 되자 이집트에서는 군주제가 사라지고 나라가 혼돈의 시대를 맞았다. 공화국 개시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가 항의로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고, 선박의 통행 금지를 하니, 이스라엘와 프랑스 영국은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3국과 협의하지 않고 폭력적인 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유엔의 개입으로 1957년 전쟁을 끝냈고,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집트가 승리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이로서 영국의 영향력이 이집트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이집트와 나세르의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아 인도와 함께 제3세계의 수장노릇을 하기도 했다.

 

  나세르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어 아랍 공화국이 되면서 여러 나라의 통일 작전이 문제를 일으켰고, 1961년 시리아의 독립 선언으로 다시 나라가 분리되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맞서 단 6일 만에 대승리한다. 이것이 6일 전쟁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 전쟁이다. 하지만 합병의 꿈은 이뤄지지 않고 다시 쪼개져 이집트 공화국으로 원상복귀했다.

 

 

(2). 안와르 사다트(1971~1981)와 호스니 무바라크의 시대(1981~2011)

  1971년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됐다. 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석유수출국인 OPEC 국가들이 석유수출을 줄이고 유가를 높여 세계적인 오일쇼크를 일으켰다. 1981년 사다트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부통령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어 30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

 

 

(3). 이집트 혁명(2011), 그리고 압델 파타 엘 시시 시대(2013년 ~)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에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민주주의로 창건된 무하마드 무르시가 당선되었다. 이집트 아랍 공화국의 최조의 민선 대통령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과 이슬람 세력이 계속 충돌했다. (세속주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자)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이슬람의 순수성을 지키자)

  집권 1년 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진 2014년 세속적 지지를 받은 이슬람 무르시 정권의 축출한다. 엘시시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이집트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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