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10. 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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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 덕분에 옛날에는 여자는 황제로 군림하는 것은커녕 쉽게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그 먼 옛날, 그 경직된 중국 사회에서 여자가 권력을 잡은 일이 두 번 있었으니 바로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다가 직접 황제가 된 측천무후와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가 그 주인공들이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당시의 중국 사람들은 여성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봐서 그 둘을 악녀라고 불렀는데, 측천무후는 악녀라고 불리기에는 그녀의 업적이 뛰어나다. 그녀가 다스리는 15년 동안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는데 말이다. 측천무후는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황제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악녀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태후는 다르다. 그녀는 악녀라는 칭호로 불려도 마땅한 사람이다.

일단 서태후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그녀는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의 황후로, 자금성에는 황후가 두 명이 있었는데 동쪽 처소에 기거하는 황후를 동태후, 서쪽 처소에 기거하는 황후를 서태후라고 했기에 그녀가 서태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즉, 서태후는 함풍제의 서태후라는 뜻이 된다. 영미권에서는 보통 'Empress Dowager Cixi'라고 부른다. Cixi(츠시)는 위의 시호 중 자희의 중국 발음이다.

부친은 만주 양람기인 예허나라 혜징 이었고, 모친은 푸차씨 이다.



그녀는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17살에 자금성 궁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였다. 그녀는 출중한 외모와 말재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녀 시절 서태후는 궁궐에서 고양이를 잃어 슬피 우는 연기를 펼쳐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되었고, 후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본래 의귀비(懿貴妃)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ㆍ함풍제의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자 후계자의 생모로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풍제는 이른 나이에 죽게 된다.

서태후는 동치제의 생모이기에 성모황태후가 되었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이므로 모후황태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대부분 권력욕이 있었던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두 태후 간의 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태후가 1881년 어느 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사망하면서 권력은 완전히 서태후가 장악하게 되었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두 태후 외에도 황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관여하고 있던 공친왕(함풍제의 동생) 때문에 청 황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동치제가 장성하여 친정을 시도하자 이번엔 모자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는 서태후가 매우 엄격하여 모자간의 사이가 멀어진 탓도 컸다. 이런 혼란이 계속 되는 가운데 동치제는 1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권력을 잡은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권력을 휘두른 방법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녀의 재위했던 시절은 19c 말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해 청나라를 강성하게끔 만들었다면 청나라는 그렇게 서양 제국들에 의해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태후 역사적 배경

동치제~광서제 연간에는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서태후 본인도 청나라의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결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면서 양무운동의 한계가 나타난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한 양무운동

그러나 군함에 쓰일 포나 화약 등을 구매할 돈을 서태후가 유용하여ㆍ별궁 이화원을 지어 청일전쟁의 패배로 연결된다.

거기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지휘관의 무능 때문까지 겹쳤었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동치제 사후엔 1875년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뻘인 아이를 양자로 들여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광서제다.

당시 황제는 4살 정도에 불과했기에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했다. 순친왕은 서태후를 두려워 하였고, 1881년에는 동태후 마저 앞서 거론했듯이 급사하였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의 친정을 시작했지만 서태후는 물러나지 않았고ㆍ정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차지하고 있었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자 처음에는 광서제를 지지하던ㆍ서태후는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이에 '변법자강파'는 서태후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위안스카이가 변법파를 배신하고 이를 서태후에게 알린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 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자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개혁 세력은 그저 황제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법안을 제정하고 그를 공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았지만

청나라의 행정이 이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덧붙여 광서제는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제왕교육을 받아야 했고

엄격한 서태후에게 눌린 탓인지 자기의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한 예로 후궁을 들일 때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가 다르자ㆍ잠시 고민하다가 말없이 고르기로 한 후궁 전부를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들로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의화단의 난과 서태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는 열강8개국 연합군

 

반청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구슬려서 구호를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꾸게 한다. 이후 서태후는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를 했다가 그게 헛소문임이 밝혀지자 부랴부랴 취소한다. 하지만 이미 의화단에 의해 자국민과 대사관 등의 피해를 입은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을 구성하여'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불평등 조약을 맺고 겨우 북경으로 귀환한다(이 때, 청나라의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이 불에 타게 된다)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파과된 청나라의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

 

서태후가 의화단을 얼마나 지지하고 지원했는지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나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의도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의화단 활동이 거세지자 1900년 4월에 서양세력들이 2개월내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하겠다는 밝혔는데 서태후는 이를 방관했고 그 결과 의화단은 오히려 수도인 베이징에 들어와 학살과 파괴행위를 했다.

사실 광서제를 중심으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서양과 강화하자는 의견도 많았고 이홍장이나 위안스카이는 적극적으로 의화단을 진압하려했으나 서태후는 오히려 의화단을 옹호했다. 결국1900년 6월 10일 8개국 연합군 선발대 2,000여명이 베이징에 들어오자ㆍ의화단의 반격으로 이를 저지해 텐진으로 후퇴했다. 이에 고무된 서태후는 사태파악 못하고 서양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린다. 게다가 '독일과 일본 공사가 의화단의 습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화가난 서양 8개국 연합군이 7월 말에 파견한 병력이 무려 군함 54척과 병력 5만여명이었다.

1ㆍ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 2만여명 상대로도 패배한 청나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개전 두 달 만에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서태후는 피난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맺어진게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다. 배상금으로 무려 4억 5천만냥을 물어내야했고, 외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했으며 기존의 통상조약에 불만이 있으면 열강들이 마음먹은대로 고칠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전에도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이권을 강탈당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는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위안스카이ㆍ 쑨원등에 의해 결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

 

서태후의 사치

그녀는 일단 사치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황실 역사상 최고라고 하니,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번 살펴보자. 그녀의 밥상에는 주식으로 30가지,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가 올라왔는데 이 한 끼 상차림에 은 100만 냥이 들었다. 은 100만 냥은 당시 중국 농민들의 약 1년 치 식량이었다(지금 돈으로 800만 원). 그녀 혼자 다 먹지도 못한 음식을 차리게 된 이유는 그저 그녀의 엄청난 식탐 때문이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금박이 입혀진 비단옷을 매우 좋아했고, 옷은 대략 2만여 벌 정도 있어 하루에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보석도 매우 좋아해 머리장식과 그녀의 긴 손톱에 보석으로 장식을 했다고 한다. 사치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별장인 이화원인데, 서태후는 청일전쟁 당시 함대를 만드는 돈을 빼돌려 자신의 별장을 꾸몄다고 한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군비를 빼돌린 것도 기가 막힌데 그것을 자신의 처소 꾸미기에 썼다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이렇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도 그녀 곁에는 충언을 해줄 신하 한 명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권력을 잡으며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한 짓부터 볼까. 아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권력을 물려줄 때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들과 권력 다툼을 벌인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은 동태후와 오히려 더 친해지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언(서태후가 권력 농단을 하려고 하면 그녀를 죽이라) 문서로 그녀가 함부로 행동을 못 하게끔 막아두고 있었다. 제1 황후인 자신과 후궁 출신 황후 서태후 간의 위계질서도 확실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서태후는 잔꾀로 동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아 동태후 스스로 함풍제의 유서를 불사르게 만든다. 자신을 옥죄던 것이 사라진 서태후는 온갖 횡포를 부리게 되는데, 일단 그녀를 믿게 된 동태후를 전병을 보내 죽게 만들고, 아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빠지게끔 방치한다. 결국 타락의 길로 가버린 아들 동치제는 모후와의 갈등을 주색잡기에 풀었고 그는 20세에 매독으로 죽고 만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아들의 아내에게 거짓 죄명을 씌워 죽인다. 이후 그녀는 4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황제로 앉혀놓고 마음껏 권력을 주무른다.

 

망국의 상황에 군대보다 이화원을 지어ㆍ 청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서태후

서태후가 가장 욕먹는 원인은 역시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 냥이다.

[인물연구]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

북양 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중국에서도 예전부터 전해져 왔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북양 함대의 예산 부족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육군으로 돌려졌을 가능성이나ㆍ광둥 해군 예산으로 돌려졌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돈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다.해군의 예산을 유용했다는 것에는 명확한 증거가 없지만 이 정도로 큰 돈이 정원 건설에 사용된 점은 분명하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대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해군의 예산을 유용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정원 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

청일전쟁의 패전의 원인은 물론 총체적인 청나라 군대의 난맥과 지휘관의 무능 때문이었지만ㆍ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이 청일전쟁 패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국은 물론 일본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 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북양 함대는 수병의 숙련도만 어느 정도 받쳐주면 일본의 함대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 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 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 대문이었다.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 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 준비는 말 그대로 무능 그 자체였다. 이것은 서태후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 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 온 그녀의 책임이라고 할 수있다.


권력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영원한 권세를 바라던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깨달았는지 몰라도, 유언으로 ‘다시는 여자가 정치하지 못하게 하라’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를 그렇게 한 것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로서가 아닌, '황후'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며 교훈 몇 가지를 얻어 가길 바란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

서양에서, 서태후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좋지않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기 책에서 이 여자가 청나라 황실을 망친 여자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서태후는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설도 있으나, 중국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배신하고 탄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의화단에 대한 미화는 있을지언정, 서태후에 대한 미화는 없다. 진보를 자처하는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 을 탄압한 서태후는 반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이며 '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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