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9. 29.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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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자연으로부터 받은 옷을 벗는 일이며, 태양과 대지가 자신의 관이라 했던 장자.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죽어가는 혼돈을 살려라



장자(莊子, BC369?~BC289?)는 노자와 더불어 도가철학(道家哲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도(道)란 길을 의미한다. 하늘에는 비행기 항로가 있고 땅에는 차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살아가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삶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도가의 트레이드마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찾을 수 있다. 인위적인 길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예화가 <장자> ‘응제왕(應帝王)’에 나오는데, ‘혼돈이 일곱 구멍으로 죽었다(渾沌七竅而死)’는 이야기다.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혼돈은 중앙에 살고 있었는데, 남쪽에 살던 숙과 북쪽의 홀이 서로 만나려면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그래서 숙과 홀은 중앙에서 만날 수 있도록 혼돈에게 부탁을 했고 그는 둘이 편안하게 만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두 사람은 어떻게 은혜를 갚을까 고민 끝에 혼돈의 얼굴에 구멍을 뚫어주기로 하였다.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성형수술 티켓을 선물로 준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은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을 수 있지만, 혼돈은 글자 그대로 혼돈 상태였던 것이다. 그들은 혼돈의 얼굴에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곱 번째 구멍을 뚫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 되어버렸다.


이 우화에서 혼돈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기 이전의 자연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구멍 뚫기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문명의 길을 뜻한다. 인간은 과학과 산업의 성장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덕분에 인간의 생활은 이전에 비해 훨씬 나아졌고 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면 더욱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인간성은 상실되고 자연과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 인류의 생존이 2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분석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혼돈처럼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만든 길이 오히려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만약 장자라면 죽어가는 혼돈을 살리기 위해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까? 가장 시급한 것은 구멍 뚫기를 멈추는 일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자후를 강력하게 외치지 않았을까. 비록 늦긴 했지만, 그 길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탐욕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평생 무위자연의 삶을 살았던 장자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태도를 견지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후하게 치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자는 제자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태양과 대지가 나의 관이다.”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참으로 장자다운 멋진 유훈이다. 그냥 들판에 버려두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몸이 까마귀와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할 수는 없다고 완강히 버틴다. 다음은 장자의 답변이다.


“땅에 묻지 않으면 까마귀와 독수리의 밥이 되겠지만, 땅에 묻는다고 해도 개미의 밥이 되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까마귀와 독수리 부리에서 먹이를 꺼내 개미의 입을 채워주려는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개미들 편만 드는 것이냐?”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장자의 시대 사상

 

1.    큰 의미에서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

 

 춘추전국시대는 시대적으로 산업혁명과 비견될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상()나라에 이어 주나라가 중국의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로부터 약 500년이 흐른 후였다. 주나라는 상나라와는 다르게 봉건제후국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중앙에서 모든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영주들을 제후국으로 인정하고 지방자치를 하게 한 것이다. 당시의 통신, 상업 교류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적절한 시스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는 천자의 나라로 군자, 즉 임금의 자손들과 소인,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구분이 있었던 시기였다. 군자와 소인은 초기에는 잘 융합하고 다스려지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전제라고 하는 것이다. 정전을 나누어 주어 소인으로 하여금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고 나라의 밭은 공동 경작하는 시스템이다. 국내 드라마인 육룡이나르샤 에서도 이 정전제 때문에 대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건국하고 세월이 500년 가량 흐르자 점차적으로 과거의 제도가 현재의 생활을 담지 못하는 상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철기의 도입으로 인한 농업 생산성의 확대는 부유한 소인을 탄생시켰고 사회 계급과 구조에 대한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사람의 길을 도()라 부르며 혼잡한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한 사상가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공자, 노자, 장자와 같은 분들이다.

 

그 중 공자는 인()을 중심으로 사회의 여러가지 개념을 정립하고 나라의 체계를 군자와 소인, 직급과 충효를 강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다. 노자와 장자는 그와는 반대로 개념화를 구분짓는 불평등으로 간주하고 개인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무위의 도()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사상은 추구하는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 한 시대를 공유하는 사상적 배경은 같다고 보았다.

 

아래의 표를 보면 그것이 더욱 명확하다.

 

 

나이

논어의 7단계(공자)

맹자(참조)

장자의 7단계

나의 상태

1

15

志學(지학)

1. 신인(). 맹자는 1,3,5,7의 홀수로 표현

逍遙遊(소요유 ,참 나의 세계, 공간을 잊어버리고, 나와 남을 가르지 말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는 순간. 이때 참 나가 보인다. 지금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나!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상태)

나를 깨침

2

 

志學(지학)

 

齊物論(제물론, 참 나의 입장에서는 세상 모든 물상은 같다. 나와 나비는 결국 같다. 참 나는 구분이 없다. 이것과 저것은 참 나의 입장에서는 같다)

현상계가 평등

3

30

自立(자립)

3. 미인(). 선이 충실하게 갖추어진 사람

養生主(양생주, 참 나의 세계에서는 영원하다. 생명의 주인을 배양한다. 육신은 죽어도 정신은 영원하다.)

나 자신의 수양

4

40

不惑(불혹)

 

人間世(인간세, 인간 세상으로 나가는 철학. 천하를 이해하기 위한 것. 나의 인격이 우주를 초월)

인간 세상에 가도
조금도 걸림 없다


5

50

知天命(지천명)

5. 대인(). 덕이 충실하여서 광명하게 뻗어나오는 사람

天德充符(천덕충부, 나의 수양으로인한 덕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

하늘 앞에서도
덕이 충만하다.


6

60

耳順(이순)

 

大宗師(대종사,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가르칠 수 있는 위치

7

70

從心(종심)

7. 성인(). 능이 남을 가르치고 교화하여 다스릴 수 있는 사람

應帝王(응제왕, 이러한 위치에 오른 사람은 능히 천하의 제왕이 될 수 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경지이다.


 

 

위의 표와 같이 공자와 맹자, 장자는 그 사상적 구성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법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장자 내편의 내용을 잘 보기 바란다.  도대체 소요유가 무엇인지 제물론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7편을 엮어서 보면 결국 제왕이 되기 위한 수양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왕의 도에서 소요유와 제물론을 중시 했을까? 하나씩 풀이를 붙여가며 보도록 하겠다.

 

 

 

 

2.    소요유 (逍遙遊)

 

 소요유의 한자에 서 볼 수 있는 착() 3번이나 사용할 정도로 장자는 운율이 있는 시인이었던 것 같다. 즐겁게 노늬는 모습을 표현 한 것인데 대단히 재미있는 분인듯 하다. 장자는 어찌 하여 가장 중요한 첫장에 그 소요유라는 흥겨운 놀이를 말하고 있을까? 첫 문장부터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명작동화가 펼쳐진다.

 

첫 구절에는 , 붕 이라는 물고기, 새가 나오고 남명으로 가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서적에서 모두다 동화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필자가 분석한 바로는 이 것은 우주만물의 운행의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12간지중 자시에서 시작해서 오시에 도달하는 그 6간지를 6월로 표현 한 것 같고 곤과 붕은 하지와 동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뜨거운 기운이 동지에서 시작해서 6절기(6간지)를 거쳐 하지로 도착하고 여기에서 다시 식어서 동지로 돌아가는 운행인 우주운행의 법칙이다. 우화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인체에 비유해 보자면 단전()에서 6가지 장기를 거쳐 머리의 뇌수(천지)로 올라가는 그 이치를 말하는 것과 같다. 시작부터 우주 운행의 법칙을 인체에 빗대어 설명 하고 있으며, 자기 몸의 운행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고 말 하고 있다. 특히 새가 날아 갈려면 구만리를 채우는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것은 그 만큼의 개인적인 수련이 없으면 진정한 도()를 깨우쳐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것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지인, 신인, 성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인은 나를 세우지 않고(참 나를 알고있다), 신인은 내세울 공덕이 없고(우주를 바꾸어도 내가 했다는 생각이 없다), 성인은 내 일(명예)을 추구하지 않는다.

 

소요유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국 막고야 산의 신선처럼 되기 위해서는 참 를 찾는 것을 우화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참 의 세계 바깥을 알 필요가 있다.

 

 의 바깥 세계는 에고, 나 자신의 감각의 세계를 말한다. 오감이 존재하고 개념으로 존재하고 너와 나를 구분하는 세계를 말한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나와 남을 구분 하게 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한다. 에고의 세계는 모두 음양과 같은 2원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참 의 세계는 이러한 2원성이 없이 절대적인 세계인 것이다. 음과 양의 균형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우화로 소개되는 혜시와 장자의 일화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에고의 세계에서 나오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이 참 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화에서 혜시에게 쓸모없던 나무가 장자에게는 즐거운 소요유를 할 수 있는 쓸모있는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고의 더 깊은 곳의 참 에게는 쓸모 있지도 없지도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명상을 하다가 오늘 한 일이 옳다, 그르다가 떠오르면 에고의 상태(현상계)이고 옳고 그름이 없는 모르는 상태(절대계)가 떠오르면 그것이 참 의 상태 인 것이다. 정치로 보면 진보의 입장에서는 보수가 보이지 않고 보수의 입장에서는 진보가 보이지 않는 것이 2원성의 세계이고 , 에고의 세계이고, 현상계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그냥 백성의 입장이 되면 참 의 세계, 즉 절대계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중요하지 않다. 양쪽다 보이는 것이다.  의 세계를 찾아내고 나의 정신의 세계( 의 세계)를 나의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소요유가 보여주는 도() 이다.

 

 

 

 

3.    제물론(齊物論)

 

 소요유에서 참 를 찾았다면 사실상 제물론은 매우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소요유에서 말했던 것처럼 참 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론(物論)은 가지런 하다는 것이다. 즉 모두 같다는 것이다. 첫 우화에서는 소리라는 것을 주제로 제물론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소리는 사물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데 사실 그 소리의 본질은 하나일 뿐이다. 천만 가지의 구멍을 통해서는 천만 가지의 소리가 나오게 되지만 결국 그 소리를 나오게 하는 참 는 누구인가를 반문 하고 있다.


본문을 잠시 읽어보자.

 

모든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것에서 보면 저것이 보이지 않지만 이것에서 보면 저것이 저것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으며,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습니다. 저것과 이것이라는 대립이 없는 것을 일러 도의 지도리라고 합니다. 지도리라 함은 비로소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하는 점입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이 기 때문에 참 를 붙잡지 못하면 그 논쟁의 끝이 없습니다. “

 

위 문장은 소요유에서 설명한 참 를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참 를 표현하기 위해서 지도리 라는 것을 비유하였는데 지도리는 문을 열고 닫을 때 그 문을 걸어 회전하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 변화 가운데의 변하지 않는 점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참 인 것이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 삶과 죽음으로 분별하게 되는데 그것을 넘어 참 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우화로는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다. 조삼모사는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화를 내거나 기쁨을 느끼는 마음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 것 또한 옳고 그름에 치우친 에고의 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때문에 성인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을 조화롭게 할 수 있도록 참 의 세계, 자연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세계로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자 내편 제물론에서는 여러 우화를 보여주면서 참 의 세계가 아닌 에고의 세계, 즉 현상계의 세계가 얼마나 무수히 많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쫓아다니는 것은 한 마디로 헛되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 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이며, 그것은 경계가 없고, 정해진 기준이 없으며 옳고 그름 이라는 분별이 없는 성인의 경지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물론은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그 가르침을 마무리 합니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습니다. 장주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며 유유자적 하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자신은 장주였습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것인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분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고 합니다.”

 

 

호접지몽은 다양한 콘텐츠에서 차용되어 많이 사용되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 속 뜻을 알기가 어려운 말이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참 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접지몽 에서도 장주와 나비사이의 분별을 만물의 변화속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것은 에고의 세계가 무한하며 끊임없이 변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 의 세계로 돌아가 만물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상태를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장자 철학을 평하다, 어떤 고민의 산물인가

 


「장자」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그것은 치열한 현실에서 패배한 몰락한 귀족 계급의 현실 도피적인 넋두리로 간단하게 평가절하되는가 하면, 삶의 우주적 깊이를 통찰한 실존적 영감으로 가득 찬 책으로 숭배되기도 한다. 또 그런가 하면 고도의 수사(修辭)를 갖춘 한 편의 문학서로 읽히기도 하고, 심미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동아시아 예술정신의 원천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여기에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탈속적 자유의 상징 혹은 전근대과 탈근대를 무시로 넘나드는 철학적 사유의 보고로까지 극찬되는 평가까지 고려하면 「장자」는 그야말로 천의 얼굴을 가진 텍스트라고 하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자」에 대한 평가의 시선들이 이렇듯 서로 다른 방향으로만 달리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하나의 공약수는 존재한다. 그것은 ‘「장자」는 난해하다’는 것이다. 「장자」의 맨 마지막 편인 「천하(天下)」는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수놓은 제자백가 개개인의 사상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품평으로 이름이 높다. 그런데 「천하」 편의 저자들 눈에 비친 장자는 “종잡을 수 없는 소리와 터무니없는 말과 끝 간 데를 모를 언사로, 수시로 내키는 대로 말하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아 자신의 견해를 특정한 입장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위로는 조물자와 노닐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끝도 시작도 없는 무궁의 경지에 있는 자와 벗삼”은 사람이다. 한마디로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이고 보면, 「장자」가 난해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자 철학의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홀로 천지의 정신과 왕래하면서도 만물을 홀시하지 않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음으로써 세속과 함께하였다.”라는 구절이다. 장자 후학들의 이런 평가는 장자 철학의 지향점이 일부의 오해처럼 이른바 ‘도(道)’로 표상되는 절대적 경지와 홀로 교감하는, 다시 말해서 세속을 초월한 단독자로서의 주체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모색한 데 장자 철학의 본령이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자기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이와 같은 방향으로 설정하였을까? 이것은 노자 철학과 비교할 때 한층 분명히 드러난다. 도와 만물의 관계에서 노자 철학은 상대적으로 도에 방점을 둔다. 「노자」는 도를 만물 운동의 후행적 결과가 아니라 선행적 형식으로, 다시 말해 만물 운동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만물을 자신의 문법 속으로 수렴시키는 도에 더 비중을 둔다. 이럴 경우 도는 만물의 초월론적 원리로서의 성격이 강화된다. 그리고 그 결과 도는 만물의 존재 가능성을 담보하는 절대적 형식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한다. 만물은 도가 펼쳐놓은 그물로부터 한 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그물은 휑하지만, 성글어도 빠뜨리는 것 하나 없다.[天網恢恢,疏而不漏.―「노자」 73장]”라는 말은 이에 대한 의미심장한 수사이다.

이처럼 노자 철학은 만물이 자신들을 규제하는 총체성의 원리인 도와 맺는 수직적 구도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사유이다. 따라서 만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같은 존재자들, 즉 다른 만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소략해진다. 모든 실천철학의 중심적 주제 가운데 하나인 ‘타자의 문제’는 노자 철학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는 것이다. 장자 철학은 이렇듯 자족적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폐쇄적인 노자적 자연관에 균열을 내어 타자를 향한 삶의 개방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장자 철학의 근본 문제의식은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삶’에 대한 추구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사실 이런 측면은 「장자」에 전반적으로 스며 있는 색채이므로 결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은밀한 것도 아니다. 대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정작 장자 철학의 특징을 읽어내야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그 ‘자유로운 삶’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장자 철학은 그 장소를 초월이 아닌 현실 속에 위치시킨다. 다시 말해서, 장자 철학은 현실을 초월한 삶의 자유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삶의 자유를 추구한다. 요컨대, 장자 철학은 초월의 철학이되 그 초월은 어디까지나 현실 회귀를 위한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장자 철학 문제의식을 이렇게 방향 짓는 것은 통상 탈속적인 사상으로 평가받는 장자 철학의 근본 성격을 뒤집는 작업이다. 그것은 장자 철학이 추구하는 이른바 ‘정신적 자유’라는 것이 고립된 개체적 삶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부단한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붕의 비상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북쪽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사는데,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한번 변하면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붕의 등판 역시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여서,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닷바람이 일렁이면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南冥]로 옮겨간다. 남쪽 바다란 곧 자연의 못[天池]을 가리킨다. 「제해(齊諧)」는 기이한 일들만 기록해놓은 책이다. 그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면 물을 3000리를 차고 나가다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상공으로 솟구쳐오른 후, 여섯 달을 날아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들은 생물들이 서로의 숨결을 내뿜는 것이다. 하늘의 저렇듯 푸르게 보이는 것은 하늘 본래의 색깔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끝 간 데를 모르기 때문일까? 붕이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또한 이와 같을 뿐일 것이다. (「소요유」)

‘성심’은 주체와 객체를 대립적인 구도로 파악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경향성이 조형해내는 부정적인 자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말 그대로 후천적으로 ‘구성된 마음[成心]’을 가리킨다. 장자가 볼 때,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은 노자가 말하듯 유가적인 성인들의 문화적 세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성심 때문이다. 성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언어에 의해 표상된 질서를 고착된 질서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가령, ‘나’라는 기표가 있을 때 이 기표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절대적 기의로서의 ‘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심을 구축시키는 주범은 언어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지향성에 불과한 우리의 자기중심적 경향성(‘욕망’이라고 불러도 좋다)이 시시각각 그 지향의 대상을 확정하고 거기에 닻을 내리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이다. 우리의 내적 지향성이 언어는 대상을 표상하는 기호의 체계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 자체가 곧 세계와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다고 착각할 때 그것이 성심으로 고착화되는 것이다. ‘세계’는 그렇게 하여 탄생한다. 그러니까 성심은 자아를 중심에 놓고 세계를 거기에 대립적으로 정립시키는, 즉 혼돈으로서 세계를 조각내는 분별심의 주체인 셈이다. 장자에 따를 때, 우리들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분별심 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성심이라는 선이해적인 지평 위에서 진행되는, 즉 인식 주관인 성심이 처음부터 왜곡된 방식으로 룰을 정해놓고 세계를 거기에 초대하는 불공정 게임이다.
장자 철학에서 ‘언어’와 ‘성심’과 ‘인식’은 이렇듯 혼돈으로서의 세계를 조각내는 악순환의 매개 고리를 형성한다. 먼저 언어가 특유의 표상 작용을 통하여 세계를 분절해 우리에게 인도한다. 그러면 우리의 생래적인 자기중심적인 경향성이 자신을 그렇게 분절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 고착화시킴으로써 고정된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런 토대 위에서 자아는 혼돈으로서의 세계를 자신 앞에 계열적으로 분절하여 다시 재정립한다. 유가와 묵가의 논쟁을 비롯한 모든 담론들은 결국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산출하는 결과물들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안은 논적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논리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순환의 고리를 자각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리를 끊고 탈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뿌리깊은 자기중심적 경향성과 언어 능력이 그 고리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붕의 비상이 그처럼 어려운 과정인 것은 바로 그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처럼 강고하기 때문이다.

「장자」를 펴면 맨 처음 나오는 대붕의 비상 과정을 그린 우화는 장자 철학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보여주는, 「장자」에서 가장 중요한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 우선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각각 ‘북명(北冥)’과 ‘남명(南冥)’이라고 불리는 대붕의 출발지와 도착지의 이름이다. ‘명(冥)’은 ‘어둡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것이 분절되어 있지 않은 혼돈의 상태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대붕의 비상은 곧 혼돈으로부터 나와 혼돈으로 돌아가는 여정인 셈이다. 여기서 ‘북명’이 성심이 구축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혼돈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남명’은 일상을 통하여 구축된 성심을 해소한 뒤에 다시 새롭게 도달하는 혼돈의 경지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곤(鯤)’이라는 물고기의 이름이다. 역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곤’의 단어적인 의미가 조그마한 물고기 새끼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그런 곤을 등이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르는 거대한 물고기라고 묘사했을까? 그것은 ‘곤’이라는 기표를 통하여 인간의 현실성과 잠재성을 동시에 드러내 보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망망대해 속의 조그만 물고기 새끼는 거대한 우주 속의 좁쌀 한 톨에도 미치는 못하는 왜소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그 왜소한 인간이 우주를 자신 속에 모두 담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세계와 대립적으로 정립하는 고착적인 자의식, 즉 성심을 해소시켜버려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가능성은 이미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잠재성의 형태로 현존한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성심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구성된 자의식이라는 사실로부터 드러난다. 결국 그 잠재성을 현실화하려는 성찰적인 노력의 유무가 관건인 것이다. 여기가 장자 철학에서 수양론이 들어서는 지점이다.

 

만약 적절한 수양의 과정을 통하여 성심을 해소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곤’이 ‘대붕’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장자는 그 탈바꿈의 변곡점을 ‘화(化)’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화’는 단순한 양태상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질적 변화(transformation)의 계기이다. 이 계기를 기점으로 곤은 붕으로 변화하며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하기 위한 비상을 준비한다. 그 비상은 물을 3000리를 차고 나가고 9만 리 상공을 솟구쳐올라야 하는 고단한 과정이다. 아마 고착적인 자의식을 해소해나가는 일의 어려움을 표현한 것일 게다. 의식의 고착성을 해소하고 세계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개방된 자아는 그런 뒤에 찾아온다. 이 새로운 유형의 자아는 마치 거울이 그렇듯이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비추고 새를 만나면 새를 비추는 그런 자아이다. 이런 까닭에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주객의 미분화는 곧 혼돈의 이미지와 통한다. 대붕의 비상 과정이 ‘북명’에서 출발하여 ‘남명’으로 귀착되는 이유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장자의 사유가 일상적 삶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일상을 재긍정해 들어오는 구도, 그러니까 동아시아적인 사유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깨달음의 구도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대붕이 9만 리 상공으로 올라간 뒤 거기서 내려다보는 지상의 색깔은 처음 지상을 출발할 때 목표로 삼았던 그 하늘의 색깔과 같지 않을까 하는, 우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독백은 아마 이런 맥락이리라.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하는 일상적 진리에 대한 강한 도리질에서 출발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여 얻은 깨달음 역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명제였다는 선(禪)의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대붕의 비상을 이야기하는 우화가 장자 철학의 근본적인 지향점을 드러내주는 우화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어두운 질곡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그 극복의 전망, 그리고 그렇게 하여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경지에 대한 묘사까지를 간결하게 아우른다. 장자 철학에서 대붕은 이처럼 장자가 지향하는 자유로운 삶의 표상이다. 고착적인 자의식을 해소시킨 삶은 자유롭다. 자신을 비운 텅 빈 마음 자리에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이다. 주먹을 움켜쥔 손이 다른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이치처럼.

 

마음 굶기기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듣는 데에 그치고 마음은 인식 내용을 맞추어보는 데 그친다. 그러나 기란 텅 빈 채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도는 오직 그런 텅 빔 속에 깃든다. 이렇듯 자신을 텅 비우는 것이 곧 심재이다.
(「인간세」)

 



거울이 되기 위한 수양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심을 깡그리 비워버리는 일이다. 후천적인 문화적 훈습(薰習)으로 특정한 색깔로 고착된 자의식인 성심은 거울의 투명성을 방해하는 얼룩이다. 이런 까닭에 자의식은 비워져야 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몸’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장자 수양론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심재(心齋)’는 이 문제에 관한 하나의 간명한 아포리즘이다. ‘마음 굶김’이라는 재치 있는 표현으로 옮겨지기도 하는 이 ‘심재’는 「장자」의 「인간세(人間世)」라는 단편에서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체들 간의 바람직하게 소통 방법을 논하는 자리에 등장한다. 여기서 ‘귀’가 우리의 감각 기관을 대표하는 제유적 기표라면 ‘마음’은 이성적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귀는 듣는 데 그친다’는 것은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감각의 수동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마음은 인식 내용을 대상과 맞추어보는 데 그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감각을 통해 그렇게 수용된 잡다하고 무질서한 감각 내용들을 우리 내부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기존의 지식 체계에 적절히 분류·배속함으로써 체계적인 정보로 가공하는 단계를 가리킨다. 이는 선험적인 12범주의 틀에 외부로부터 수용된 감각 내용을 대입해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지식을 형성시키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오성(悟性)이 수행하는 역할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것을 ‘주관’이라고 하든 ‘범주’라고 하든 혹은 장자처럼 ‘성심’이라고 하든, 그 이름이야 무엇이든 아무튼 외부로부터 수용된 감각 내용을 대입시켜 정리할 수 있는 모종의 선이해가 내부에 먼저 전제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말의 요지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인식은 역시 그 자체가 이미 폭력적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심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점차로 구축되어가고 결국은 하나의 특정한 색깔로 고착된다.

이것을 간파한 장자는 우리에게 ‘마음’을 거부하고 ‘기(氣)’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동아시아적인 우주관에서 ‘기’는 특정한 형식을 고집하지 않는 유동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역동적인 질료로서, 유행(流行)의 과정에서 다양한 계기들을 모티브로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사물로 부침하는 그런 존재이다. 장자가 여기서 ‘기’를 통해 취하고 있는 이미지는 그런 무정형성이다. ‘기란 텅 빈 채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이 곧 그 뜻이다. 장자가 볼 때, ‘도’로 표현되는 우주적 질서는 언제나 그런 고착화되지 않는 역동적 흐름 속에 깃든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기’는 또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앞서 언급한 ‘몸’이다. 의식의 세뇌를 통해 문화화되기 이전의 우리 몸은 그 자체가 무정형적인 역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심재’는 곧 ‘마음’을 비워 ‘몸’을 회복함으로써 삶의 리듬을 우주적 질서의 그것과 함께하려는 실천적인 행위이다.

 

포정의 소 잡기

포정(庖丁―요리를 담당하는 직책에 있는 인물)이 군주인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으로 붙잡고 어깨로 받치고 발로 밝고 무릎으로 누르면서 칼을 놀려나가는데, 쉭 하는 소리에 살이 나뉘고 휙 하는 소리에 뼈가 발라졌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리듬을 타지 않음이 없어, 상림(桑林―은나라 탕임금의 음악)이라는 춤곡에도 어울렸고 경수(經首―요임금의 음악)의 음절에도 들어맞았다. 문혜군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오, 대단하도다! 기술의 경지가 이 정도에 이를 수도 있구나!” 그러자 포정이 칼을 내려놓으면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그것은 기술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경지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모든 게 소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다 3년쯤 지나자 더 이상 소 몸뚱이는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몸의 리듬[神]으로 소를 잡아나가지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며 잡지는 않습니다. 감각의 기능이 멈추면 비로소 몸의 리듬이 움직여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큰 뼈를 가르고 관절의 틈새로 칼을 들여미는데, 소 몸뚱아리의 타고난 결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리하여 제 솜씨는 아직 한 번도 소의 힘줄을 건든 적도 없을 정도이니, 하물며 큰 뼈 같은 것이 있는 부분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금 뛰어난 주방장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무리하게 베기 때문이며, 평범한 주방장이라면 달마다 한 번씩 바꾸는데 이는 뼈를 억지로 자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의 칼은 19년이나 되었고 그 칼로 잡은 소도 수천 마리에 달하지만 칼날은 아직도 금방 숫돌에서 갈아낸 듯합니다. 저 소의 관절에는 틈새가 있고 제 칼날은 두께가 없는 까닭입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로 틈새가 있는 관절 사이를 헤집고 다니니[以無厚入有間], 거기에는 반드시 휑하니 칼을 자유롭게 놀리고도 남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19년이나 썼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 방금 갈아낸 듯한 것입니다. 허나 비록 그렇더라도 근육이라도 뭉쳐 있는 부분을 만날 때면 저는 그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조심조심 경계하며 눈길을 지그시 멈추고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칼을 미묘하게 놀립니다. 그러다 보면 ‘휙’ 소리와 함께 살들이 발라져 마치 흙덩이처럼 떨어져나옵니다. 그러면 저는 칼을 거두고 일어서서 자리를 둘러보고는 무언가 아쉬움을 머금은 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칼을 씻어 갈무리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이치를 깨달았노라.” (「양생주」)

 

일찍이 “배움을 실천한다는 것은 날마다 무언가를 보태는 것이고, 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날마다 무언가를 덜어내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48장]”라는 말을 통해 노자가 그 핵심을 지적했던 것처럼, ‘비움’은 ‘학습’이란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주입되어 들어왔으면서도 오히려 우리 몸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기의들을 추방하는 작업이다. ‘학습’이라는 것 자체가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임을 실토하는 문화의 자기 고백이다. 만약 하나의 기표와 기의가 처음부터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학습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달하려는 기의를 실어 나르는 기표는 자의적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기의의 공급자는 그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세뇌시켜야 하고 수요자는 당연한 것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군자(君子)’라는 도덕적 주체로 만들어가려는 작업 과정에서 유학이 일차적으로 꼽는 방법론이 학습이라는 점은 이런 면에서 시사적이다. 그러므로 ‘비움’에 대한 장자의 관심은 사상사적으로 유학적인 몸 만들기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정확히 간파한 결과인 셈이기도 한 것이다.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비움’의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부딪치는 승부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의식의 해소이다. 장자가 몸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수양론이 대부분 마지막 관문으로 ‘죽음’에 대한 초월적 태도를 요청하는 것은 자아의식을 해소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관문만 넘어서고 나면 몸은 거울처럼 자유로운 기표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럴 때 제도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몸의 탈출 작업은 성공한다. 만약 모든 것이 기호라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이 때 우리 몸을 기표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기의는 우리 몸의 자연성뿐이다.

물론 여기서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몸의 위장된 자연성과 본래적 자연성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성 본능이라도 자본의 논리에 따라 철저하게 위장된 소비 대상으로서의 성 본능과 자연 그대로의 성 본능은 구분해야 한다. 자연성으로서의 성 본능이 상대적으로 지니고 있는 건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벌거벗고 사는 원주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즘 이것 빼놓고는 마치 인간이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신분석학적인 성 역시, 장자적인 시각을 적용한다면 상당 부분 제도화된 성을 인간의 자연적인 성 본능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 즉 ‘소요(逍遙)’는 우리가 제도성으로 은폐되지 않은 몸의 그러한 원초적인 자연성에만 필연적인 결합의 권리를 허용하고 나머지 일체의 기의에 대해서는 거울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녹아 흐르는, 말 그대로 ‘몸’ 그 자체로 세계와 만날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이럴 때 몸은 소 잡는 포정의 경우처럼 비로소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합일된 심미적 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포정이 소를 잡는 우화에서 ‘칼’이 우리의 삶이라면 ‘소’는 그 삶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이런 구도에서 본다면, 이 우화가 전달하려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두께가 없는 칼날로 틈새가 있는 관절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以無厚入有間]’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다. ‘두께가 없는 칼날’은 곧 비움(虛)의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틈새가 있는 관절’은? 그것은 아마 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도’, 즉 우주적 질서의 결일 것이다. 최선의 삶은 자신을 그 우주적 질서의 흐름에 완벽하게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통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의식을 철저하게 비워낼 때에만 가능하다. 소를 잡을 때 더 이상 소를 잡는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되는 이치처럼, 그 철저함은 궁극적으로 비운다는 의식마저도 비워낸 완전한 비움을 통해서만 달성된다. 그러할 때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마음을 떠나 몸의 자연성에 온전한 보금자리를 틀 것이다.

장자는 이 상태를 더 이상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몸의 자연적인 리듬, 즉 ‘신(神)’을 통해 소를 잡아나가는 경지라고 말한다. 동양 철학에서 ‘신’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그것은 ‘god’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기 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불가사의한 측면, 그러니까 이성적 합리성으로는 걸러지지 않는 역동성의 측면을 가리키는 술어이다. 말 그대로 ‘신묘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눈이 아니라 ‘신’으로 소를 만난다는 것은 몸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 리듬, 즉 ‘느낌’의 시스템에 맡긴다는 뜻이 된다. 「장자」에 특히 기술의 달인과 관련된 우화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의 궁극적인 경지란 곧 ‘생각 없이’ 몸의 리듬에 맡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포정의 입을 빌려 그런 경지는 기술이 아니라 도의 차원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기술과 도를 구분 짓는가? 그것은 아마 삶일 것이다. 삶이 배제되고 도구로 전락한 기술이 아니라 천년의 숨결을 빚어내는 도공의 경우처럼 그 자체가 곧 삶인 그런 기술 말이다. 포정이 자신이 도달한 경지는 기술이 아니라 도의 차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모든 삶은 궁극적으로 도를 머금을 수 있다. 기술이 아닌 삶은 없을 터이므로.

 


나비 꿈

한 번은 장주(莊周: 장자(莊子)의 본명)가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나풋나풋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마음 가는 대로 노닐면서,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어보니 분명한 장주 자신이었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사물의 연쇄적인 소통의 계열[物化]이라고 한다. (「제물론」)

그러면 도를 머금은 삶의 내용은 무엇인가? 장자는 그것을 앞의 거울의 비유에서 “모든 사태들을 능동적으로 즐기면서도 그로부터 어떠한 해도 입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일견 가장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듯이 보이는 삶에 대해 장자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바로 그때라야 비로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일상적 삶의 진리와 그대로 통하는 역설이다. 장자에게서 세상은 타자와의 약속되지 않은 만남이 시시각각으로 연출해내는 역동성 그 자체이다. 최선의 삶은 아무런 예단 없이 바로 그 역동성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장자의 사유를 기본적으로 심미적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는 또한 장자의 사유가 노자의 그것과 갈리지는 또 다른 길목이기도 하다.

[인물연구] 장자, 장자의 사상 탐구


노자와 장자의 차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지만, 지금 우리의 논의 속에서 말한다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노자가 정태적임에 반하여 장자는 동태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노자의 생각 속에는 도(道)로 상징되는 이 세계의 질서를 원리적인 면에서 완벽하게 통관해낼 수 있고, 또 그것을 삶의 제 측면에 응용할 수 있다는 신념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장자의 경우 세계의 그런 존재 방식은 인정하되 그것을 원리적인 면에서 통관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포기한다. 대신 그는 세계의 그런 역동성을 주목하고 그 자체에 삶을 맡기며 즐기는 듯이 보인다. 이것이 「노자」에 사회·정치적 관심이 지배적임에 비하여 「장자」에는 상대적으로 심미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유이다.

이런 예를 든다면 이 차이점이 좀 더 분명해질지 모르겠다. 노자와 장자는 똑같이 파도는 바람과 바닷물의 마찰로 생기며, 이때 밀물이나 썰물이 해류와 부딪치면 마찰력이 배가되어 그 상승 작용으로 더 큰 파도가 생긴다는 사실, 즉 파도의 발생 원리를 안다. 그런데 노자가 해변에 앉아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을 그런 원리에 입각하여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읽어내려는 유형이라면, 장자는 그런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보드에 몸을 맡긴 후 모든 것을 잊은 채 파도타기에 몰입하며 즐기는 유형이다. 이 점에서 장자는 노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삶은 세계의 완벽한 교직적 질서의 그물보다 더 원초적인 사건인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별로 발견되지 않는 수양론적 요소들이 장자에서는 대량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장자의 유명한 ‘나비 꿈[胡蝶夢]’ 우화는 이 맥락에서 읽혀야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우화의 의미를 분석할 때 종종 논란이 되는 구절이 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대목이다. 이 구절과 그 앞의 내용 사이에 의미상의 엇박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이다. 앞의 내용은 ‘장주’와 ‘나비’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이란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양자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고 하고 있으니 문맥의 단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절이 아니다.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장자 철학이 추구하는 ‘타자와의 소통’의 근본 성격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만물은 당연히 서로 구분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구분은 사람 사는 세상, 즉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대로 성립한다. 사람 또한 서로 다른 습관과 생각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서로 ‘구분’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지만 ‘성심’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가 내게로 들어올 수 있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상호 소통적 존재이다. ‘나비 꿈’ 우화를 타자와의 조우가 필연적인 삶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자유를 확보하는 방법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주’는 ‘나비’가 아니고 ‘나비’는 ‘장주’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 비움’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라면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없다.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화’의 의미를 좌우하는 키스톤인 “이것을 일러 사물의 연쇄적인 소통의 계열[物化]이라고 한다.”라고 할 때의 ‘이것[此]’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앞의 역설적 상황, 즉 ‘분명 구분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변용이 이루어지는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물화’는 결국 ‘사물들 간의 상호 변용’이라는 의미로 최종 독해된다.

이와 같은 변용이 이루어질 때 삶은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새로운 세계 속에 노출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직전의 삶이 닻을 내리고 있던 세계 그 자체도 변용시킨다. ‘물화’란 장주가 장주로서, 나비가 나비로서 각각 구별된 세계 속에서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그 고유성이 변화하여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궁극에는 그 삶이 몸담았던 세계 자체까지 변용되는 사태이다. 이 점에서 ‘물화’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사물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그 세계 자체 또한 변화되는 사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비 꿈’은 장주가 나비라는 다른 사물로 변화된 것 이상으로,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던, 장주 자신이 나비로 존재하는 세계가 출현하고, 그 새로운 세계를 온전히 향수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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