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인문학 (Humanities)/3. 인물, 단체 연구 (Research on people, group)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9. 1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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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8일(현지시각) 숨을 거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2022년 2월6일 즉위 70주년을 넘기는 등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며, 영국이 ‘대영제국 이후 시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영욕을 함께 한 군주다. 영국 군주는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정치적 권한을 의회에 넘겨주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지만, 여왕은 이런 한계 속에서도 영향력과 존재감을 한껏 발휘했다. 국가 통합의 상징적 존재라는 역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만족시켜, 군주제 존속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면서 영향력을 극대화한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이었다.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조지6세가 선왕 조지5세의 차남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1936년 12월 큰아버지였던 에드워드 8세가 왕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려고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왕이 됐고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 승계서열 1순위가 됐다. 세계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 당시 겨우 14살이었던 그는 처음으로 대국민 라디오연설을 했다. 신의 가호로 영국은 끝내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1942년 군대를 사열하며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45년에는 여군 지원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탄약을 관리하고 군용트럭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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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남편 필립은 13살 때 처음 만났고 한눈에 반했다. 그리스 앤드류 왕자의 아들이었던 필립과는 먼 친척사이다. 이후 몇년동안 계속 연락을 이어오다 연인이 됐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20일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이듬해 찰스 왕세자를 낳았다. 필립과 케냐를 방문중이던 1952년 2월6일 조지6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왕위를 계승하면서 본명인 엘리자베스를 그대로 존호로 썼고, 선왕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구분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불렸다. 1953년 6월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은 처음으로 방송에 생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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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전통을 고수했다. 총리 임명권자이지만 의회의 결정을 존중했으며, 의회 시정 연설에서도 총리실에서 작성한 원고를 받아들였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총리와의 면담 때도 직접적인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올해 6월 성대하게 치러진 즉위 70주년 기념 플래티넘 주빌리에는 군주제에 반대하는 이들조차도 축하를 보냈다.

재임 기간 여왕은 영연방 국가를 순회하며,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 힘썼다. 영국은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1947년 인도, 파키스탄을 시작으로 미얀마, 이집트 등이 잇달아 독립했다. 영국은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영연방으로 묶고 여왕을 수장으로 세우면서 연결고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여왕은 이들 나라를 자주 방문하며 유대관계를 다져나갔다. 1973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영연방회의에 참석했고, 1976년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왕의 방문이 역사가 된 순간도 있었다. 1965년, 당시 서독 방문은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전쟁의 종결을 상징하는 외교 행사가 됐다. 또 2011년, 옛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공화국을 방문해 해묵은 갈등 봉합에 힘썼다. 당시 여왕은 “우리가 모두 지난 역사 속에서 과도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슬프고 유감스럽다” 말했다.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여왕은 영연방에서 두루 사랑을 받았지만, 가족과 관련해선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장남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비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지지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특히 다이애나비가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불운의 사고로 사망한 뒤엔 엘리자베스 2세와 영국 왕실이 대중의 비난까지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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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2세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들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특정 시기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애를 가장 솔직하게 담아낸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은 영화 <더 퀸(The Queen)>(2007)이다. 작품은 1997년 8월, 영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찰스 왕세자의 아내이자 여왕의 며느리인 故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 절차에 대한 내각과 여왕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며느리인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다이애나 비의 사망 이후,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그녀의 신분을 영국 왕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했던 여왕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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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영국의 여론은 다이애나 비에게 훨씬 더 우호적이었고 이로 인해 영국 왕실은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에 왕실의 존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진보 내각의 집권으로 여왕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약 일주일에 걸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설득 끝에, 여왕과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 비에 대한 추모를 공식적으로 공표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주연 배우들의 호연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호평 받으며, 영국 아카데미 등 수많은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다.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장편 드라마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영국 왕실으 이야기를 다른 작품으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크라운>이 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총 4개의 시즌이 방영됐으며, 6개의 시즌으로 종결될 예정인 이 드라마는 여왕과 영국 왕실 사람들이 직접 시청한 것으로도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다만, 드라마와 실제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을 시청한 왕실 사람들은 “재미있긴 하지만, 과장된 부분들이 많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애니메이션에서도 등장한다. 폭력·정치 등의 소재를 독보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에서는 미국을 다시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영국 여왕으로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헬싱> OVA판에서는 주인공인 뱀파이어 ‘아카드’가 영국 여왕을 대면하고 각자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얼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감안하면 여기에서의 여왕은 엘리자베스 2세다.

[역사인물] 영국의 상징이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녀의 흔적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락 음악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사회에 대한 저항 정신을 골자로 하는 ‘펑크 락(Punk Rock)’이 영국에서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와 연관됐다. 197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악동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정규앨범 (1977)에는 ‘God Save the Queen’이라는 곡이 수록돼있다.

여기서의 Queen은 당시 즉위 25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여왕인데, 곡의 가사는 여왕에 대한 욕설과 조롱으로 가득하다. 여왕에 대한 노골적 조롱으로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은 영국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God Save the Queen’


이러한 반응은 오히려 펑크 락의 확산에 불을 지폈고, 섹스 피스톨즈는 “전 세계 락 음악의 역사를 바꾼 이들”이라고 칭송받기도 했다. ‘God Save the Queen’은 음악비평지 <롤링스톤>이 선정한 500대 명곡 중 175위에 이름을 올렸다.

흥미롭게도 70년 7개월이라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 기간은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1대 이승만~20대 윤석열)이 재직했고, 또 재직하고 있는 기간과 같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나중 문제라고 할지라도, 인류의 현대사에서 ‘퀸 엘리자베스’의 존재감은 남다르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격동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들고서 버텨낸 그녀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기억될 만하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https://www.econov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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