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연구] 바다 그 자체였던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 유동룡.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은 더 일에 몰두해도 시간이 너무 짧다”며 정력적인 모습을 피력했던 그가 지난 6월 26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뇌출혈로 끝내 숨지고 말았다. 향년 75세.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무사시노 공대를 졸업한 전도한 건축학도였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조선인이란 이유로 그를 받아주는 건축사무소가 없었다. 이타미 준은 이 곤욕스러운 시기를 동네의 작은 커피숍이나 식당 같은 생활 밀착형 공간을 설계하며 보냈다. 이렇게 4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일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개소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경계 없이 활동하던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003년 프랑스 기메 박물관이 초청해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 건축가> 개인전을 열었다. 2005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훈장도 받았다. 특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건축계가 그를 인정하기 쉽지 않았는데, 개인전 <먹의 공간, 물의 공간>을 통해 그는 재일동포로는 드물게 일본건축가협회 정회원이 됐다. “나 같은 재일동포 2세들은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늘 경계에 서 왔다. 가슴속에는 늘 태극기를 품고 살아왔지만, 두 개의 조국 사이에서 두 개의 정체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게 울분의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온 그가 지난해 드디어 ‘무라노 도고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근대 건축의 아버지인 무라노 도고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라 단 한 번도 외국인에게 영광이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 상이었을 테다. 그렇다고 그를 일본 건축가로만 기억할 수는 없다. 1968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는 그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무작정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조선에 매료돼 방대한 양의 민화와 백자를 수집하기도 했다.
1988년 서울 방배동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에 ‘각인의 탑’을 설계하며 국내에서도 스타 건축가로 떠올랐던 그. ‘온양박물관’, ‘포도 호텔’, ‘수·풍·석 미술관’ 등이 그의 국내 대표작이다. 특히 포도 호텔은 제주의 오름과 전통 초가의 모양새가 잘 녹아든 건물로 제주도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제주도 핀크스 미술관 ‘수·풍·석’ 역시 ‘건축은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라는 이타미 준의 평소 철학이 잘 드러난 작업이다. 2009년에는 제주영어교육도시 개발 사업의 건축 총괄 책임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끝내 귀화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거창에 묻힐 예정. 이타미 준의 맏딸인 유이화 소장은 고인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이다.
자연적인 소재를 살린 건축
이타미 준은 건축물에 현대의 대표적인 건축 자재인 콘크리트에 흙, 돌, 금속, 유리, 나무 같은 자연 소재를 대비해 특징을 부각시켰다. 특히 그는 건축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며 건축물에 쓰인 소재의 질감과 특성을 작품의 일부로 활용했다. 이타미 준의 데뷔작품인 <어머니의 집>은 유리의 특성을 활용한 건축물이다. 이 주택의 특징은 외벽을 감싸는 유리 곡면이다. 유리 곡면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바꿔 때로는 푸른빛으로, 때로는 금빛으로 반짝인다.
현대 건축의 결핍을 채워주는 원시적 요소와 따뜻함
이타미 준은 복제된 듯 똑같은 모습을 한 차가운 건축물을 비판했다. 그는 현대 건축에는 건축의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빠졌다고 주장했다. 건축물에는 인간의 따뜻한 온도와 야성적이고 근원적인 매력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야성적이고 근원적인 매력은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해야만 표출된다. 번잡한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이타미 준의 건축물은 자연의 소재로 묵직한 무게감과 야성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각인의 탑>은 그의 한국 스튜디오이자 자료관으로 쓰기 위해 건설되었다. 돌과 흙을 재료로 지은 <각인의 탑>은 마치 하늘을 향해 기원을 올리는 듯한 단단한 탑의 모습으로 현대와는 동떨어진 원시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 <먹의 공간> 등도 암석, 대나무, 철의 자연미를 강조하며 현대 건축에 일침을 가한다.
이타미 준의 정점, <제주 프로젝트>
40년간 그가 쌓아온 내공은 제주 프로젝트를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타미 준은 제주도의 ‘비오토피아’ 단지를 총괄 설계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작업의 현장으로 삼았다. 이타미 준은 제주도의 지형과 자연물을 완벽히 파악해 한 폭의 그림처럼 건축물과 자연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비오토피아’단지 내부의건축물 중에 제주도의 산과 오름의 곡선을 활용한 <포도 호텔>, <핀크스멤버스 골프클럽하우스> 그리고 <두손 미술관>은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바위처럼 자연에 녹아들었다. 제주 프로젝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수, 풍, 석 미술관>은 하늘과 물이 만나는 공간, 바람이 지나간 공간, 돌의공간을 아름답게 구성했다. 이렇듯 고향 제주도의 지형을 활용해 이타미 준은 자신의 경력에 정점을 찍는 작품을 제작했다.